[독일에서 한국인 여자로 산다는 것]
찬 공기와 시도 때도 없이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점차 따듯한 햇살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즈음 독일어 어학수업이 시작되었다. 기숙사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학생들 중 교환학생들을 알아보는 것은 쉬웠다. 두리번거리며 차창밖을 살펴본다던지 정류장 앞에 서서 상기된 얼굴로 버스노선을 확인하는 학생들은 열이면 열 교환학생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내가 있었다. 일단 서로의 신분을 알게 되면 같은 처지라는 소속감이 생긴다. 인사와 동시에 이름을 밝히는데 그 후 묻는 것들은 어디서 왔느냐,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정도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말하면 늘 같은 것을 물었다. "그럼 너 북한에서 왔어?" 그리고 어김없이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동양인이 유독 적은 독일의 한 도시에서 <코리아>에서 온 여학생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시내의 빵집에서도 길거리의 키오스크 앞에서도 나를 관찰하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따라다녔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교환학생 무리 중에서도 동아시아에서 온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 뿐이었다. 우리는 함께 다니면 ‘왜 너네는 항상 같이 다녀?’ 따로 다니면 ‘왜 너네는 같이 안다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을 하던 생김새와 국적 때문에 별나게 보이는 건가 싶을 정도로.
내가 독일에 도착한 2013년은 아직 한국의 문화와 음악이 지금처럼 유럽에서 호응을 얻기 전이었다. 그렇기에 그 무렵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된 싸이의 존재가 더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외국사람들이 우리나라 가수를 좋아하고 열광하는 데 있어서 신기함과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한국전쟁 이후로 나라가 분단된 후 마치 섬 같은 곳에서 살아온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외국인이란 특별한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 또한 독일에 오기 전 22년간을 한국에서 나고 한국사람들과 교육을 받았고 일을 했다. 뉴스에서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 농촌의 국제결혼 등의 이슈를 접하기는 했어도 평범한 대학생의 일상생활에서 외국인을 만날 기회란 현저히 적었다. 물론 학과에도 교환학생으로 온 중국인 학생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들은 보통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지는 못해서 보통 같은 중국인들끼리 무리를 지어 다녔다. 그래서일까 나는 독일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을 했다. 여러 나라에서 독일로 여행 오는 관광객들이 있겠지만, 주로 독일의 인구의 대부분은 독일인 일 것이고 독일어로 소통할 것이라고. 하지만 독일 땅에서 내가 속한 커뮤니티는 교환학생이라는 외국인 그룹이었다. 그리고 그 커뮤니티에 속하려면 나는 독일어가 아닌 영어를 써야 했다.
독일어 어학수업은 이 주간 진행되었다. 예순이 조금 안돼 보이는 안경을 낀 무표정의 남자 선생님과 대략 서른 명 정도의 교환학생이 교실에 모여 앉았다. 학점이 인정되는 정식 수업이 아니어서 그런지 학생들의 수업태도는 마치 초등학교에 온 것 마냥 산만했고 독일어를 배운 적이 있는 학생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수업 내내 몰래 핸드폰을 하거나 잡담을 했다. 다들 독일어는 뒷전이고 수업 후에 어디서 놀지 학기 시작 전에 여행은 어디로 갈지를 이야기하느라 분주했다. 당시 내 마음도 붕 떠있기는 매한가지였다. 독일어보다 영어를 배우는 게 급선무처럼 느껴졌다. 독일어 수업시간을 제외한 모든 일상에서 교환학생들은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는데 교환학생들 중 대다수가 주로 남미 국가에서 왔기 때문에 수능 영어 듣기 평가에서 듣던 미국식 혹은 영국식 영어와는 억양과 어휘가 너무나 달랐다. 게다가 수능 영어는 수능 당일 3교시 외국어영역이 끝난 이후로 더 이상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그것 또한 삼 년 전 일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나는 독일어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에 오면 생뚱맞게 프렌즈 같은 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면서 영어공부를 했다. 화창한 날이면 독일까지 와서 기숙사 방구석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내 처지가 너무나 처량했다. 하지만 현실은 단어장을 달달 외워야 했던 고등학생 시절도 퇴근 후 두 시간 회화 공부를 하던 인턴 시절도 아니었다. 기숙사 방문을 열고 누군가와 마주치는 매 순간이 실전이었다. 그렇게 혼자 고군분투 하기를 열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니 서서히 외국인 친구들의 영어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영어는 모두에게 외국어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할 때에도 은근슬쩍 농담도 한 마디씩 할 수 있게 되었다. 점차 교환학생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게 편해질수록 그들을 국적과 생김새에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보려 했다. 한편으로는 그들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아주기를 희망하면서.
그렇게 외국인 친구들과 조금씩 친해질 무렵 일주일에 한 번씩 기숙사 지하 세탁실에서 파티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두 개의 기숙사 건물 지하에는 창고 겸 세탁실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금요일 밤이면 스피커를 가져다 놓고는 파티를 한다는 것이었다. 일명 런더리 파티(laundry-party)라고 불리는 이 파티의 이상한 점은 두 개의 건물 중 주로 외국인이 쓰는 다른 건물에서만 파티가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했다. 하지만 파티가 있는 날에는 국적에 상관없이 많은 학생들이 슬금슬금 지하 세탁실로 모이기 시작했다. 소문으로 듣던 세탁실에 들어가자 구석에는 마트에서 파는 가장 값이 저렴한 맥주들이 쌓여있었고 중앙의 오래된 탁자 위에는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저녁이 무르익고 시계가 10시를 가리킬 무렵이 되자 세탁실은 고막을 쩌렁쩌렁 울리는 음악의 울림으로 가득 찼다. 평소 한국에서도 클럽에 잘 가지 않아서 이런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클럽과 다른 점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눈빛이었다. 마치 짝짓기를 하기 위한 맞선 시장 같은 한국 클럽 분위기와는 달리 런더리 파티에 온 학생들은 그야말로 좋아하는 음악에 춤을 추고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고 즐기러 온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쭈뼛쭈뼛 서있기가 지루해질 무렵 나도 구석에서 싸구려 맥주를 하나 들고 마시면서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우리는 함께 술에 취해 춤을 추고 얼굴을 찡그리며 사진을 찍고 말도 안 되는 영어로 대화를 하며 낯선 땅에서 젊음을 축하했다.
기숙사에서는 종종 런더리 파티 말고도 여러 가지 핑계로 많은 파티들이 열렸다. 누군가의 생일에는 물론이고 같은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주최하는 파티 혹은 그냥 심심해서 하는 파티들이 매일같이 이어졌다. 마치 파티를 목적으로 교환학생으로 온 것 마냥 말이다. 참가의 조건 또한 매우 간단했는데 같은 기숙사에 살거나 그의 지인이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한 이유로 나도 몇 번의 파티에 참가했었다. 각자 마실 맥주를 들고 가면 그것만으로 파티를 즐길 수 있는 조건이 충분했으니 기숙사 방에 혼자 앉아 외로이 미드를 보는 것보다는 훨씬 매력적이었다. 한 번은 룸메이트와 그녀가 그새 사귄 멕시코와 터키에서 온 여학생들과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안나는 누군가의 생일파티에 가게 되었다. 파티가 열리는 플랫이 있는 층계에 다다르기도 전에 음악소리만으로도 파티가 열리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플랫에 들어서자 부엌에서는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활짝 열린 플랫의 모든 방안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 틈을 겨우 비집고 몇몇의 아는 얼굴과 인사를 하고 생일을 맞은 친구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날따라 파티에 온 사람으로 플랫은 미어터졌고 편하게 앉을 곳은커녕 서있을 자리도 모자를 지경에 이르었다. 그 난리통에 일행과도 떨어져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 어정쩡하게 복도 끝의 방문 앞에서 맥주를 들고 서있었다. 조금만 있다가 자연스럽게 나가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 순간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어? 안녕, 나 너 본 적 있는데!" 투박한 러시아 억양이 섞인 영어로 또래 남자애가 말을 걸어왔다. 당시 나는 한창 외국인 친구 사귀기에 열중해 있던 참이었고, 게다가 파티에서 혼자 멀뚱멀뚱 서있는 것보다 비참한 일도 없기 때문에 내심 처음 보는 이와의 대화가 반가웠다. 우리는 플랫 전체를 울리는 음악소리를 비집고 대화를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아이는 음악소리를 핑계로 점점 나에게 다가오더니 갑자기 귓속말을 했다. "Hey, I like asian girls.(저기, 난 아시아 여자애들을 좋아해)" 시끄러운 음악에도 불구하고 그 문장은 내 귀로 들어왔다.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그 의도가 궁금해지려던 순간 누군가 내 팔을 낚아챘다. 룸메이트였다. "언니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네" 하며 그녀는 그 남학생에게 싱긋 웃고는 나를 그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다. 며칠 후 들은 이야기로는 그 남학생을 주로 아시아에서 온 여자애들에게 수작을 부린다고 소문이 나있다고 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Yellow fever>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차별은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본인이 일상에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면 주류(Main stream)에 속해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 한국인은 주류에 속한다. 한국인은 한국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다. 물론 더 작은 단위에서는 얼마든지 차별이 이루어질 수 있다. 출신 지역에 따라서 성별에 따라서 혹은 직업이나 학력 또는 생김새에 따라서 차별할 이유와 조건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차별들의 원인은 주로 차별받는 그 자신이 바꿀 수 없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인종차별은 다른 어떤 차별보다 더 아픈 것 일 수도 있다. 독일에서 나는 출신으로는 아시아의 끝자락에 있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왔고, 성별은 여자였으며 생김새는 아시안이었다. 이곳에서 소수의 소수의 소수에 속하는 것이었다. 나의 작은 메인스트림에서 벗어나니 이 나라에서 나의 존재 자체가 소수에 속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한국인의 해외여행이 잦아진 만큼 이제는 <Yellow fever>라는 단어를 많은 사람이 접해보았을 것이다. 굳이 좋게 해석하자면 아시아 출신의 여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주로 이 단어는 상대적으로 다른 국가의 여성들보다 순종적이고 친절한 아시아 여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을 뜻한다.
이 단어를 알게 된 순간 내 머릿속에는 독일에 온 지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내가 경험했던 많은 일들이 연상되었다. 학교 가는 길에 이유도 없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던 차들, 치마를 입고 공사장 근처를 지나갔을 때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휘파람을 불던 인부들의 괴상한 표정 따위들 말이다. 불쾌하지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생김새와 피부색 그리고 출신 국가는 그 무엇 하나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차별하는 그들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혹은 차별하면서 자신의 우위를 확고하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의 저의를 알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어 왔다. 내가 만약 이걸 알았다면 나는 독일에 오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마음도 조금씩 밀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답은 '아니다'였다. 차별받는 이에게 이유를 찾으려면 끝이 없다. 차별하는 이에게 이유를 찾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분명한 건 이유가 무엇이든지 그중 타당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몇 번의 파티에 더 갔고 매번 새로운 친구들을 만들었다. 한편 이 주간의 독일어 어학수업은 끝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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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독일, 이방인으로 다시 서기
한국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다 어느 날 마음이 펑하고 터져버린 저자는 문득 새로운 경험을 찾아 독일로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 어렵게 찾은 보금자리에 들어선 순간 남자들이 우글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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