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 둥지틀기]
그러나 독일로 교환학생을 가기 전까지만 해도 독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디자인 수업에서 배운 독일의 대표 디자인 양식인 바우하우스(Buahaus)와 브라운(Braun)사가 전부였다. 그 외엔 역사적으로는 일본과 같이 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었다는 무거운 얘기가 있겠고 밝은 쪽은 한국처럼 분단국가였다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그 후 유럽의 대표적인 수출국으로 경제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 정도를 알고 있었다. 또 뭐가 있을까, 맥주? 소시지? 마인강의 기적? 게르만으로 불렸던 백인들이 많이 사는 나라? 독일이 나의 제1 지망 국가였던 것은 단지 유럽의 중앙에 있어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지리적 조건 때문이었다. 무려 아홉 개의 국가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독일은 한반도에서 자란 나에게 자유 그 자체를 의미했다.
교환학생 합격이 되고 나서도 사실 떠난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아직 독일학교에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떠나야 할 시간이 삼주 정도 남았을 때야 뒤늦게 교환학교에서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다. 바쁜 마음으로 항공편과 기숙사를 알아보았다. 독일의 행정처리 속도는 매우 늦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자주 이 기다림의 시간이 반복될 것이라는 것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합격통보를 받은 후 디자인 학부에서 나와 같은 학교로 가는 세 명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학생들이었다. 우리는 함께 모여 간단한 통성명을 하고 사무적으로 독일어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그중 한 명은 어느 순간 잘 나오지 않더니 결국 스터디그룹에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남은 우리 셋은 함께 독일로 가는 모든 일정을 계획했다. 독일 대학교에서 보내준 서류에는 세계 공용어라는 영어가 가뭄에 콩 나듯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기숙사 신청 페이지에서는 모습조차 감추어버렸다. 우리는 상형문자 해독하듯 한 단어씩 인터넷에 찾아보고 그나마도 알 수 없는 것들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마음 가는 곳에 체크를 하며 준비를 마무리했다. 떠나기 전 삼 주간은 굉장히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설렘보다 불안이, 기대보다는 긴장이 더 컸던 시간들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짐가방을 싸는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걱정 어린 시선과 그 속에 들어가 장난을 치던 우리 집 강아지, 송별회에서 우스갯소리로 '독일 가면 독일 남자랑 데이트 꼭 해봐야 해!' 하던 친구들 그리고 값진 시간을 보내라며 선물해준 친구의 가죽 다이어리이다.
드디어 다가온 출국 날 아침, 부모님과의 짧은 인사를 뒤로하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동반자는 친구라 하기엔 어색하고 지인이라 하기엔 조금 가까운 두 명의 여학생이었다. 준비물은 아부다비를 경유하는 비행기 티켓 한 장과 육 개월 후 돌아올 티켓 한 장 그리고 30kg 수화물 한도를 꽉 채운 이민가방 하나였다. 비행기가 한국을 떠난 후에도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맥락 없이 흘러갔다. 부적처럼 가방 안 깊은 곳에 넣어놓은 낯선 유로 화폐들을 생각하며 독일에 도착할 시간만을 앓듯이 기다렸다. 총 16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드디어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독일에서 가장 큰 공항이라지만 예상보다 작은 규모는 화려한 인천공항에 비해서 어딘가 초라하고 단조롭게 느껴졌다. 눈에 익지 않은 낯선 언어의 물결을 헤치며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의 뒤통수를 쫓아갔다. 검문소 앞에 줄을 서니 유니폼을 입은 공항경찰들이 무표정으로 느긋하게 입국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미리 준비해둔 독일어를 몇 번이고 곱씹으며 기다렸지만, 막상 내 차례가 되자 말을 나오지 않았다. 대신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공손하게 한국에서 몇 번이고 확인한 서류를 건넸다. 서류를 받아든 검문소 직원은 몇 초간의 침묵과 함께 서류를 앞 뒤로 꼼꼼하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 후 형식상의 질문이 몇가지 오간 후 그는 선심 쓰듯 여권에 도장을 쾅하고 찍어주었다. 무뚝뚝하던 담당경찰의 얼굴이 찰나 풀어지며 나에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Viel Spaß in Deutschland(독일에서 좋은 시간 보내)!" 안도감과 함께 드디어 낯선 땅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독일아 내가 왔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같이 온 친구의 지인이 우리를 마중 나왔다.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중이라 했다. 세 개의 이민가방을 트렁크에 싣고 교환학교가 있는 도시로 삼십 분가량을 달렸다. 겨울바람이 매서운 2월 말의 독일 풍경은 쓸쓸하고 삭막해 보였다. 한국에서 본 적이 없는 나무들, 낯선 표지판과 네모 반듯한 건물들이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차가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내로 진입하자 마치 가시가 돋친 주먹을 쥐고 있는 듯한 나무들과 이끼가 잔뜩 낀 것처럼 겨울에도 푸른빛을 유지하고 있는 공원들이 보였다. 우리는 숙소로 가기 전 간단하게 독일식으로 식사를 했다. 따듯하게 갓 튀겨 나온 돼지고기와 감자가 독일에서의 첫끼였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열흘간 따듯한 음식을 구경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각자 자리에 누웠지만 나와 일행은 긴장을 풀 수 없었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방안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조용히 일기장을 꺼내어 몇 마디 적고 잠에 들었다.
친구의 지인분이 호텔에 데려다주신 것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하늘이 도왔다 싶다. 다음날부터 홀로서기를 시작해야했던 여행길은 고생스러웠다. 버스표를 사기위해 낯선 지폐를 하나씩 꺼내어 계산하는 모습은 스스로도 셈을 배우는 아이들처럼 미숙하게 느껴졌다. 여자 셋과 이민가방을 태운 버스는 바닥에 닿을 듯 주저앉았던 차체를 일으키고는 곧장 기숙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마침 눈 같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게으른 나귀를 몰듯이 무거운 이민가방을 끌고 십여분을 걸었다. 비는 곧 눈송이로 변했다. 하얗게 변한 거리 끝에는 사진에서만 봤던 건물이 서있었다.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두 개의 기숙사 건물은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2차 세계 이후 1970년대까지 미군의 시설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Camp pieri(캄프 피에리)'는 학생들 사이에서 짧게 ‘캄피에리’라고 불렸다. 우리는 드디어 이 낯선 땅에 내 보금자리가 생긴다는 설렘에 부풀어 추위도 잊은 채 그 앞에 서서 하염없이 기숙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기숙사 관리인 사무실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노크를 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니 얼굴에 웃음기는커녕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관리인이 사무실에 가구처럼 앉아있었다. 이름을 밝히니 그녀는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는 서류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계약서에 적힌 날에 정확히 입주할 수 있어 오늘은 입주를 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도착했을 당시에는 학교는 방학중이었기 때문에 사나흘 정도는 먼저 입주할 수 있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융통성이 넘치는 나라에서 온 순진한 여학생들의 어이없는 실수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 중 1인실을 선택한 친구의 방이 일찍 비워져 있었다. 세평 남짓한 방에 짐을 밀어 놓고 나니 방안은 그새 발 디딜 곳 없이 가득 찼다. 방바닥에서 자리 깔고 어떻게든 잠을 자려고 해 봤지만 라디에이터로 난방을 하는 기숙사의 바닥은 냉골같이 찼다. 결국 밤에는 두 명이 1인용 침대에 몸을 비집으며 눕고 나머지 한 명은 의자에 앉아 눈을 붙여야만 했다. 시차 적응도 안된 상태에서 불편하게 이틀 밤을 보내고 나니 우리의 행색은 눈에 띄게 초췌해져 갔다. 결국 마지막 하루는 방 주인 친구에게 미안해져 나는 방을 아직 배정받지 못한 다른 친구와 근처에서 가장 값싼 호스텔에서 하루를 보냈다.
드디어 삼월의 첫날 기숙사 방이 비워지고 우리는 방을 안내받았다. 설레는 마음에 무거운 이민가방마저 가볍게 느껴졌다. 지정된 플랫으로 입성해보니 배정된 기숙사는 4인이 한 플랫을 공유하는 플랫으로 1인 1실을 쓰며 부엌과 화장실은 공용이었다. 플랫의 낡은 철문을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제일 먼저 방 마다 앞에 싸구려 카펫 앞에 늘어진 커다란 신발들과 그리고 플랫의 가장 끝쪽에 활짝 열린 큰방이 눈에 들어왔다. 아뿔싸,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기숙사 신청 시 2인 1실을 선택했다는 것과 남녀가 한 건물도 아닌 한 플랫을 공유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순간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어렵게 구해서 간신히 입주하게 된 기숙사였다. 집 떠난 지 어느덧 일주일, 따듯한 밥과 잠자리가 슬슬 그리워지는 때였다. 그리고 비록 혼돈의 남녀공용 기숙사에서도 서로 지켜주는 한국인 동지가 있으니 어느 정도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그래, 외국 드라마에서 이런 거 본 것 같아’ 또는 ‘너무 촌스럽게 굴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새로 생긴 보금자리는 작지만 정 붙일 구석이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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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독일, 이방인으로 다시 서기
한국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다 어느 날 마음이 펑하고 터져버린 저자는 문득 새로운 경험을 찾아 독일로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 어렵게 찾은 보금자리에 들어선 순간 남자들이 우글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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