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야기의 시작]
독일 가면 독일 남자랑 데이트 꼭 해봐야 해! 친구들은 내게 힘주어 말했다. 독일을 떠나기 얼마전 나는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짧은 연애를 뒤로하고 있었다. 8년이 지난 지금은 이름 조차 희미해져 가는 딱 그 정도 사이의 남자였다. 추억이라 하기엔 내용이 없고 모른 척 지나가기엔 마음속 돌멩이 하나가 꿈틀 하는 기분이 드는 정도의 인연. 나의 교환학생 기간의 반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그의 프로필 사진은 이미 새 연인과 함께였고 한국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웨딩 사진으로 바뀌어있었다. 이별을 뒤로한 채였지만 그렇다고 독일에서 어떤 특별한 인연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반년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고, 어쭙잖게 마음을 주었다 장거리 연애 따위로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또한 국적을 이유로 만남의 대상을 정하는 것도 이상한 것으로 느껴졌다. 나에게 불쾌함을 주었던 아시안 피버와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흔들 다리 위에서의 고백은 안정적인 지면 위에서보다 성공률이 높다고 한다. 뇌가 불안함을 마치 설렘으로 착각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이란다. 낯선 나라에서의 하루하루는 흔들 다리 위보다 더 격렬하게 요동치는 듯이 느껴졌고 잠시라도 튼튼한 지면 위로 올라서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집을 떠나온 지 벌써 한 달이었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자주 생각났다. 맘 편히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그리워졌다.
학기 시작 전 플랫 친구들에게 음식을 해 준 그날, 플랫메이트 A는 밤늦게 양손 가득 케이크와 와인을 가져왔었다. 그리고 가져온 케이크는 식탁 위에 놓인 지 얼마 안 되어서 모두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흡족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던 A는 돌연 비스바덴 야경을 보러 가지 않겠냐며 제안했다. J와 F는 이미 그곳에 다녀온 적이 있었기에 A와 나를 포함한 한국인 여자 셋만 함께 길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는 기숙사 밖을 나와 주차되어 있는 그의 차로 걸어갔다. 친절한 A의 모습에 마음이 동한 나는 그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 친구들에게 보조석에 타도되겠냐고 동의를 구했다. 기숙사에서 비스바덴 야경이 보이는 언덕까지는 차로 15분 정도가 걸렸다. 뒷자리에 탄 친구들은 저녁식사에서 마신 술기운이 올라오는 듯 모두 곤히 잠이 들었다. 차가 어두운 길거리를 달리며 언덕을 올라가는 동안 그는 라디오 채널을 연신 바꿔가며 신중히 노래를 골랐다. 마음에 드는 노래를 찾은듯한 A는 그제야 나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잘하는 그와 호기심이 많은 나는 좋은 대화 상대였다. A의 낮은 차분한 목소리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와 어울려 듣기 좋았다. 서투른 영어로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뒷자리 친구들을 깨우고 차에서 내려 전망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밤늦은 시간이라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가로등마저 멀찍이 서로 떨어져 있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어둠을 헤치고 안개처럼 빛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자 포도밭 언덕 너머로 비스바덴 시내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서울의 야경과는 너무나 다른 이곳의 야경은 높은 건물이 많이 없어 마치 작은 크리스마스 모형 같기도 했고 또는 노을이 지는 바다 같기도 했다. 찬 공기 속에 포근함이 담겨있는 밤바람을 맞으며 우리 넷은 한동안 말없이 야경을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A와 나는 아주 조금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특별히 그 후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으나 플랫 안에서 마주치면 간단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종종 세탁기에 넣을 동전이 모자라면 편하게 방문을 두드려 묻기도 했다. 인포마틱을 공부하는 그는 늘 기숙사 안에서 편한 옷차림이었지만 방은 늘 깔끔하게 정돈해 두었다. 주말이면 대게 부모님을 찾아 집을 비우는 듯했고, 내성적인 듯 보이다가도 대화의 물꼬가 트이면 활발하고 유쾌하게 말을 했다. 밤에는 종종 그의 방문 너머로 기타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A와 우연히 플랫에서 만나게 되면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이 이성에 대한 호감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자상한 그는 도움을 줄 때엔 아빠 같았고 장난을 칠 때면 오빠 같았다.
학기가 시작된 후 처음 갔던 캠퍼스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것은 새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개강파티(Semester Party)에 대한 포스터였다. 새 학기를 맞이해 학교 학생회에서 주최한 파티가 시내 클럽에서 열린다는 것이었다. 머지않아 기숙사에서 에라스뮈스 친구들을 만나면 서로 파티에 가냐고 묻기 시작했다. 사실 한국에서 신입생 때 오티(오리엔테이션 파티)와 환영주 따위를 호되게 겪은 후라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플랫 친구들이 어느 날 우리 방문을 두드리며 파티에 함께 가자고 물어왔다. 들뜬 얼굴로 묻는 플랫 메이트들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동했다. 그리고 독일의 신입생 환영회는 다를 거라는 생각에 호기심도 들었다. 대학가의 저렴한 호프집에서 반강제로 환영주를 마시고, 선배라는 이름의 남들에게 둘러싸여 술을 들이켜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만으로도 부담감이 덜어졌다. 실제 이곳 독일에서는 선, 후배의 개념이 없다. 그저 한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사이일 뿐 그 안의 위계는 없는 것이다.
며칠 후 페이스북 에라스무스 페이지에 하나의 포스팅이 올라왔다. 파티 당일 몇 시간 전 런더리 룸에서 간단하게 다 같이 모여서 맥주를 마시고 버스를 타고 클럽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파티에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옷장을 살펴보니 입고 갈 만한 옷이 하나도 없었다. 룸메이트와 시내에 나가 주머니 사정에 맞게 하운엠(H&M)을 찾았다. 고르고 고르다 결국 세일 코너에서 20유로짜리 심플한 검은색 미니 드레스와 검은 구두를 구입했다. 파티 당일은 마침 날씨도 좋아서 오랜만에 두꺼운 옷들을 껴입지 않아도 되었다. 괜스레 기분이 설레기 시작했다. 새로 산 드레스 위에 간단한 재킷을 걸치고 플랫 메이트들과 초저녁부터 음악이 들려오는 기숙사 세탁실로 향했다. 그곳엔 한 달 만에 익숙해진 얼굴들로 가득차 있었다. 에라스무스 학생들은 벌써 맥주를 몇 잔 마신 듯 보였고 간혹 보이는 독일인 학생들도 들떠보였다. 우리는 구석에서 무리를 지어 오랜만에 플랫 메이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티 시간이 다가오자 스무 명 정도의 인파와 함께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기 위해 길을 떠났다. 우리가 올라타자 버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젊어 보이는 운전기사는 미소 띤 얼굴로 백미러를 통해 슬쩍 돌아볼 뿐 크게 제지하지 않았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나서야 시내의 클럽에 도착할 수 있었다. 클럽 앞에는 입장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이어졌고 그 끝에는 두 명의 안내요원이 서있었다. 그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귀뿐만 아니라 심장까지 울리는 듯한 음악소리가 클럽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가량을 친구들과 웃으며 춤을 추며 놀다 보니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맥주를 한잔 사들고는 열기를 식히러 나는 혼자 잠시 클럽 밖으로 나갔다.
클럽 밖에는 입장한 후 볼 수 없었던 A의 친구 B가 담배를 물고는 어쩐지 우울하게 서있었다. 다가가 안부를 물으니 그는 곧 집에 가지 않을까 고민 중이라는 것이었다. 왠지 신이나 있던 나는 오늘은 재밌게 놀다 가자고 그를 복둗아 주었다. 십 분 정도 우리는 농담 따먹기 등을 하며 잠시 밖에서 얘기를 했고 그는 기분이 나아졌다며 감사의 음료를 사겠다고 했다. 나는 B와 함께 음료를 사서 클럽 안의 위층 계단에서 춤을 추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내가 한잔의 음료를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비워내자 B는 다른 한잔을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B를 기다리며 혼자 스테이지 위를 내려보고 있는데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A가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클럽에 들어온 후 볼 수 없었던 그를 만나니 반가웠다. 몇 번의 대화가 클럽 안의 노랫소리를 힘겹게 비집고 오갔다. 우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섰다. 순간 클럽의 열기가 대뜸 내 입에서 '난 네가 좋아'라는 말을 뱉게했다. 그리고 그도 마찬가지인듯 했다. 하지만 간단한 두 문장을 주고받은 우리 둘 사이의 공기는 순식간에 변하고 말았다. 클럽 안 계단 위에서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클럽 안은 여전히 쿵쿵 울리며 밤과 내일을 잊은 사람들로 들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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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독일, 이방인으로 다시 서기
한국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다 어느 날 마음이 펑하고 터져버린 저자는 문득 새로운 경험을 찾아 독일로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 어렵게 찾은 보금자리에 들어선 순간 남자들이 우글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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