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견문록

9 - 일주일간의 누드사진 여행

비바제인 2023. 3. 20. 19:13

[프랑스로 떠난 캠핑에서 벌어진 독일 교수와의 갈등]

 

여름이 다가오는 5월 말이 되자 학기 초에 신청했던 포스터 디자인, 동판화 그리고 사진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도 시각디자인을 부전공하고 있었기에 포스터 디자인은 생경한 분야는 아니었다. 반면 손으로 동판에 그림을 새겨서 약품에 담그는 동판화 수업과 실제 모델을 카메라로 담아내는 사진 수업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중 사진 수업은 사진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실습 위주 수업방식임에 비해 과제의 부담은 별로 없고 학기말에 함께 여행만 다녀오면 된다는 같은 과의 친구 이야기에 혹해서 신청한 것이었다. 사실 무엇을 하든지 좋은 말로만 포장되어 있는 것들을 가장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지만 말이다.  

사진 수업의 정식 명칭은 누드 포토그라피였다. 말 그대로 나체 모델을 사진에 담는 수업이었다. 첫 수업에서 교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피터 린드버그(Peter Lindbergh)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폴란드 태생 독일 사진가인 그는 살아생전 세계적인 모델이나 유명인사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성들의 사진에 담았다. 패션 사진을 주로 찍지만 그 안엔 그만의 철학이 담겨있었고 누드사진을 찍지만 그저 외설적으로만 비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고 느낀 감상이었다. 예순이 다되 보이는 얼굴에 비해서 나름 젊게 입고 다니던 담당 교수도 유명하지는 않지만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는 작가였다.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교수는 린드버그의 작품을 찬양하듯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교수는 이번 학기 수업의 목표는 콘셉트 설정부터 촬영 준비 모델 섭외와 촬영 그리고 보정까지 촬영의 전 과정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 대다수는 나처럼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몇몇은 사진을 진로로 정하고 벌써부터 포트폴리오까지 준비할 정도로 수업에 대한 집중도가 높은 학생들도 있었다. 대가의 작품을 예시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구체적인 실습 설명까지 들으니 사진에 점차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1996년 이탈리안 보그지에 실린 피터 린드버그가 촬영한 밀라 요보비치, 내가 처음 접한 그의 작품이기도 했다.

 

첫 실습은 교수의 사진 촬영을 돕는 것이었다. 참가도 자유인 이 실습은 자신이 원하면 와서 촬영을 거들거나 구경하면 된다고 했었다. 수업에서 공지받은 대로 학생들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에 한 장소에 모였다. 약속 장소는 비스바덴 시내에 있는 낡고 오래된 3층 건물의 한 보눙(Wohnung - 독일에서는 일반적으로 주거용 건물의 여러 방에서 폐쇄되어 한 명 이상의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칭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대표적인 주거형태인 아파트의 한세대 또한 Wohnung이라고 일컫는다.)이었다. 촬영 시간이 되자 전문 모델이 안으로 들어왔고 교수와 조교수 그리고 열정적인 학생들이 촬영의 전 과정을 도맡아서 진행했다. 나머지 학생들에게 주어진 일은 전혀 없었다. 같은 수업을 신청한 에라스무스 학생인 Z 그리고 C와 함께 구석에 모여 멀뚱히 촬영을 지켜봤다. 촬영 장소는 누가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돈이 안되어 마치 폐허처럼 보였다. 벽에는 오래전 칠해진 듯한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바닥에는 이전에는 옷으로 쓰였음이 분명해 보이는 천들이 뒹굴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소품 삼아 첫 번째 촬영이 진행되었다. 촬영 준비가 끝나고 슈팅이 시작되자 촬영 스텝과 모델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했다. 슬며시 훔쳐본 뷰파인더 속의 사진은 낡은 이곳을 마치 전문 스튜디오같이 보이게 했다. 그때인 것 같다. 내가 찰나의 순간을 기록하는 사진에 매료된 것이. 그 이후로 수업에서 여행을 갈 때까지 두어 번의 실습이 이어졌다. 사실 실습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때까지만 해도 학생들에게 제대로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교수가 촬영을 끝내고 모든 스케줄이 정리가 되면 그제야 개인적으로 모델에게 부탁해 몇 컷을 찍어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 또한 열정이 가득한 학생들만의 일이었다. 첫 번째 수업을 제외한 모든 실습은 독일어로 이루어졌고, 교수는 중요한 공지만을 실습 막바지에 영어로 전달해주었기 때문에 나와 같은 에라스무스 학생들은 완전히 실습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메라 조작법이나 이론 등에 대한 정보도 독일어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당시 내 독일어는 마트에서 겨우 계산을 하는 수준이었다. 그리하여 날이 지나갈수록 사진에 대한 흥미도 줄어들었고, 다른 수업과 다르게 정기적으로 진행되지 않는 실습은 한 달에 한번 겨우 있을 뿐이어서 나중에는 정식 수업이 아니라 이벤트성 워크숍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사진 수업의 존재가 희미해져 갈 무렵 사진 수업의 여행일자가 다가왔다. 목적지는 프랑스의 아를레스(Arles)였다. 아름다운 해변과 수려한 자연경관 덕에 사진 촬영을 하기에 적합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레콘트레스 드 아를레스(Rencontres d’Arles)라는 1969년도부터 이어지고 있는 세계적인 사진페스티벌이었다. 하지만 나름 사진에 대해 열정이 있는 학생들이 신청한 수업이라고 해도, 굳이 학기 내에 자비를 부담해서 다른 나라로 캠핑을 갈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7박 8일의 긴 여행의 또 다른 특이점은 여행에 참가를 하지 않으면 학점을 아예 받을 수 없어 반강제적으로 모든 학생이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교통, 숙박 등의 모든 비용은 학생들이 돈을 모아 부담해야 했다. 교수 스스로는 여행을 강요하면서도 여행 경비에 한 푼의 돈도 보태지 않겠다는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독일 대학교의 한 학기 등록금이 300유로인 것을 미루어보았을 때 성적을 받기 위한 여행에 250유로를 내야 하는 것은 대체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학생들에게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결국 수업의 주가 되는 독일인 학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여행 경비를 줄일 궁리를 해보았지만, 결과적으론 일인당 200유로 정도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외곽의 저렴한 캠핑장에서 캠핑을 하고, 교통은 교수의 차와 학생이 지인에게 빌린 지프차에 나누어 타면 비용을 조금 줄일 수 있었다.

여행을 준비하고 일정을 조율하는 모든 과정에 에라스무스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없었다. 우선 여행의 기간도, 장소도 모두 교수가 일방적으로 통보를 했기 때문이다. 그 외 장비와 차량 대여, 캠핑장 컨택 등은 이곳 사정에 밝은 독일 학생들이 하는 게 수월했다. 거의 두 달여간의 준비과정 동안 우리가 교수와 직접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한 것은 딱 한 번이었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날 무렵 교수는 나와 다른 한국 여학생을 불러서는, 다짜고짜 자신이 한국으로 두어 달 가량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으며, 당시에 한국음식에 매료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같은 간단한 인사말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으나 당시에는 그가 한국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 어쩐지 반가웠다. 독일에 온 지 세 달 동안 한국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주로 다짜고짜 북한에 대해 묻거나, 싸이의 강남스타일 춤을 춰 봐라 하는 이야기를 하거나 혹은 아시안 피버를 갖은 변태가 전부였다. 우리는 웃는 얼굴로 그의 말에 호응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가 이내 꺼낸 본론은, 자신이 모든 재료를 준비할 테니 여행에서 한 번만 김치찌개를 해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내가 왜 그곳에서 굳이 한국음식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름 한국문에 대한 관심을 보내주는 것에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캠핑이니 돌아가면서 음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떨결에 승낙을 하게 된 우리는 교수에게 필요한 재료를 알려주었다.

여행날이 다가왔고 우리는 아침일찍부터 캠퍼스 앞 주차장에 모였다. 모든 이들이 모이자 독일에서 간간하게 장을 보기로 했다. 캠핑을 준비하면서 급속도로 친해진 나와 Z는 아무래도 프랑스에서 우리가 무엇을 먹게 될지 혹은 제대로 끼니를 먹을 수는 있는지 불안해하며 큰 누텔라 한통을 구입했다. 여차하면 아무 빵이나 사서 찍어먹으면 되리라. 장을 보고 나서는 일행은 지프차 안으로 모든 짐과 함께 구겨 넣어졌다. 제일 중요한 것은 촬영장비 그다음은 캠핑장비였고 빈자리 사이에 사람이 채워졌다. 내 자리는 차량의 뒷자리 중 가장 불편한 가운데 자리였다. 왼쪽 발아래에는 배낭가방이 쌓여있었고 오른쪽에는 음식과 음료가 가득 든 비닐봉지가 놓여있었다. 허리라도 곧게 피려 하면 자동차 천장에 머리가 닿았다. 그렇게 차는 휴게소를 들릴 때를 제외하고는 8시간을 내리 프랑스를 향해 달려 아를레스 외곽의 한 캠핑장에 도착했다. 무려 8시간을 달려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변에 보이는 것은 풀밭과 줄지어있는 텐트들 뿐이었다. Z와 나는 남자 친구가 빌려준 아담한 2인용 팝업 텐트를 같이 썼다. 여자 두 명에게도 텐트는 조금 비좁았고 침낭은커녕 담요 한 장씩만 달랑 들고 온 우리의 잠자리는 편할리 없었다. 반면 교수가 혼자 타고 온 차 위에는 하드탑 텐트라고도 불리는 접이식 텐트가 탑재되어 있었다. 그는 이 일행 중에 가장 편하게 이 여행을 즐기는 듯해 보였다. 학생들이 땡볕 아래서 사진 촬영에 대해 계획을 세우거나 식사 준비를 할 동안 교수는 수영복을 입고 캠핑장 안 수영장에서 그만의 휴가를 즐겼다. 그래도 도착한 첫날은 나름 평화롭게 흘러갔다. 모두들 이 지루하고 불편했던 자동차에서 벗어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만으로 들떠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착한 날 밤부터 요리를 해야 했다. 한여름의 무더운 날씨에 교수가 준비해온 재료들이 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일찍 해치우고 싶은 마음이었고, 사실 싫다고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게 독일로 교환학생을 와서 수업에서 프랑스로 캠핑을 와서 김치찌개를 만드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그중 한국 학생 한 명과 나와 친해진 Z가 일을 거두어주었으나 열악한 캠핑장에서 쪼그려 앉아 조리시간이 긴 한국요리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교수는 내가 요리를 하는 내내 주변을 맴돌며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먹은 음식은 어떤 것이 있었으며, 그때의 맛은 어땠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질문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조리에 집중한 척 대답 없이 요리를 했다. 한 시간이 조금 안돼서 완성된 김치찌개와 밥을 함께 독일 학생들과 에라스무스 친구들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난생처음 보는 음식에 몇몇은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후후 불어가며 한술씩 뜨기 시작했다. 맵다고 급히 마실 것을 찾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맛있게 먹는듯했다. 교수는 눈에 불을 켜고 혼자 왔다 갔다 하며 연신 자신의 그릇에 음식을 도로 채웠다. 이상한 것은 그 후로 그 누구도 캠핑에서 요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다음날 일이 터졌다. 캠핑장에서는 웬만해서는 늦잠을 잘 수가 없었는데, 텐트가 운 좋게 그늘에 놓여있지 않은 이상 아침 일찍부터 내리쬐는 햇살에 텐트 안은 그야말로 사우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잠시 밖으로 나와 그늘로 텐트를 옮긴다 해도 햇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텐트를 쫓아온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일찍 눈을 떠야만 했다. 캠핑장은 시내와 한참 떨어져 있었고, 차를 운전할 줄 아는 몇몇 독일 학생들이 공금으로 걷은 돈에서 빵을 사 왔다. 우리는 잼도 버터도 심지어 커피도 없이 정말 빵만을 받았다. 우리가 모은 공금으로 일주일을 버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Z와 나는 독일 마트에서 누텔라를 사 온 우리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정말 맨 빵으로 일주일을 버텨야 했기 때문이다. 교수는 캠핑장에 딸린 카페테리아에서 매일 아침 식사를 하는 듯했다. 10유로를 매일 아침식사 때마다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교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아침식사를 끝내고 교수와 우리는 모여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니, 교수와 독일 학생들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독일어로 이야기했다. 여행에 동행한 4명의 에라스무스 학생 중 독일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독일 학생들 중 영어를 잘하는 여학생 한 명이 중간중간 회의 내용을 통역해 주었으나, 이야기 내용이 많거나 본인이 굳이 일일이 통역하고 싶지 않으면 그마저도 하지 않는 듯했다.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우리는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회의시간 내내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길어짐에 따라 에라스무스 학생을 은 지루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더운 날씨에, 회의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그 내용마저 이해할 수 없으니 말이다. 중간중간 그들은 독일어로 의견을 모으고 심지어는 투표까지 하는 듯했다. 그들은 교수, 학생 할 것 없이 평등하게 의견을 조율하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들끼리는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들끼리 여행의 대략적인 일정을 조율한 듯했고 교수는 통역을 하던 학생을 시켜 우리에게 전달하도록 시켰다. 우리의 의견 없이 마무리된 결론이 우리에게 완전히 마음에 들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나와 에라스무스 학생들은 불만이 생겼다.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취급하는 것도 짜증이 났다. 결국 나는 교수에게 학생들 거의 대부분이 영어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처음부터 영어로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 강의 정보에도 분명 영어로 수업이 진행된다 하여 수강신청을 한 것이라며 항의를 했다. 그러자 그는 놀라며 “그래서 방금 통역을 시킨 것 아니냐, 모든 정보를 영어로 전달했다”라고 이번에는 영어로 말을 했다. 아니 이렇게 영어를 잘하면서? 황당해 하면서도 지지 않고 “모든 의사결정이 끝난 상태에서 전달만 하는 것과 함께 토론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도 같은 학생인데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며 대꾸했다. 나의 항의에 에라스무스 학생들 뿐만 아니라 클래스의 다른 독일인 학생들도 동의하는 듯했다. 모두들 동조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오히려 교수는 화를 내며 말했다.

 "너네 벌써 독일에 온지도 세 달이 다 되지 않았어? 그럼 당연히 독일어 이제 다 알아들어야 하는 거 아냐?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독일어를 못하는 너네 잘 못이야."

교수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 상황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곳에서 차별대우를 받으며 이 나이 많은 교수와 아이들처럼 말싸움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 점차 분노로 머릿속이 가득 차자 할 말을 영어로 고르기가 힘들어졌다. 말은 버벅거리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가득 차 올랐다. 상황이 점차 심각해지자 Z는 나를 데리고 캠핑장소를 벗어났다. 얼마 후 캠핑장의 카페테리아에 각자 얼음이 가득 든 콜라를 시키고 앉았다. 나는 할 말을 다 못했다는 분함과 교수의 부조리한 대처에 아직도 화를 식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차가운 콜라를 권하며 말했다.

 "저런 바보 때문에 네가 눈물을 흘릴 이유는 없어."

그렇게 사진 여행의 둘째 날이 지나갔다.  

아를레스의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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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독일, 이방인으로 다시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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