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견문록

8 - 동화의 결말이 늘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니까

비바제인 2023. 3. 19. 06:08

[엇갈린 듯 맞추어진 우리의 인연]

 

어릴 때 봤던 동화는 모두 이렇게 끝이 났다. '공주는 왕자님과 입맞춤을 했고 둘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제 어른이 돼버린 나는 알고 있다. 대부분의 동화는 사실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고, 해피엔딩의 정의 또한 다시 따져보게 되는 것이 어른이라는 것을. 현란한 음악과 조명 그리고 그 아래에서 일어났던 해프닝 같은 입맞춤은 동화 속 마법 같은 일이었지만 입맞춤이 끝났을 때는 우리가 현실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A와 나는 플랫으로 함께 돌아가기를 약속하고 잠시 서로의 친구들에게로 돌아갔었는데, 몇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난 그는 그새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나와 룸메이트 그리고 그녀가 클럽에서 사귄 다른 친구 한 명과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A까지 네 명은 기숙사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 몸을 실었다. 뒷자리 A와 함께 앉아택시가 코너를 돌 때마다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걱정과 함께 한숨이 나왔다. 택시가 기숙사에 도착하자 우리는 힘을 합쳐 술에 취한 A를 부축해 3층에 위치한 우리 플랫으로 함께 올라갔다. 그의 주머니에서 겨우 방열쇠를 찾아 A를 간신히 침대 위에 올려놓고 나자 우리 세 사람은 술기운이 거의 달아난 상태가 되었다. 작은 소동 뒤에 A를 제외한 우리 셋은 뒤풀이 겸 함께 부엌에서 맥주 한잔을 더 하기로 했다. 잠시 방에서 쉬고 있던 A는 정신을 조금 차렸는지 다시 부엌으로 조금은 비틀거리며 나왔다. 하지만 그의 손에 들려있는 기타를 보아하니 그는 술이 깬 것이 아니라 여전히 취한 상태로 우리가 틀어놓은 음악소리에 이끌려 나온 것 같았다. 천진난만하게 기타를 치면서 술을 더 마시려는 A를 우리는 다시 진정시켜 방으로 돌려보냈고, 다시 난리통에 진이 빠져버린 우리는 마지막 술자리를 정리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침이 되자 창문 위에 걸쳐놓은 오렌지색 침대보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방안을 밝히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찾아 시간을 보니 때는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사실 나는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있었지만 이불 안에서 배고픔도 참아가며 늦장을 부리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어제의 기억이 연기같이 아련하게 하지만 진한 향수처럼 강렬하게 나를 덮쳐왔기 때문이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지만 온전히 충동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를 오빠처럼 아빠처럼 느꼈던 것이, 실제로는 호감이었다는 것을 스스로는 어젯밤 일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입맞춤 뒤에 다시 만취되어 나타난 그와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었기 때문이다. 벽 하나를 두고 위치한 그의 방 안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이불 안에서 고민하기를 한참, 시계가 두 칸을 더 지나 오후가 다가오자 더 이상 배고픔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큰 맘을 먹고 방을 나섰다. 기숙사 안은 조용했다. 룸메이트는 장을 보겠다고 나간 후였고 다른 방에서도 전혀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불이 켜져 있는 남자화장실을 보아하니 누군가가 플랫에 남아있긴 한 것 같았다. 부엌에서 재빠르게 간단히 먹을 것을 챙겨 방 안으로 향하는 찰나 화장실 문이 열렸고, 방금 샤워를 마친 A와 마주쳤다. 플랫 안에서 지금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이와 마주쳐버린 나는 자연스러움을 연기하며 그에게 안부를 물었다.

"어제 많이 마신 것 같던데 괜찮아?"

"어, 그런 것 같더라. 숙취가 좀 있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을 했다.

"그럴 때도 있지 뭐. 잘 쉬어." 

짧은 대답을 하고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어제는 미안했어, 나 너무 취해서 어제 일이 잘 기억이 안 나." 

그의 말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무엇이 기억이 안 난다는 거지? 입맞춤? 집에 돌아온 것? 방 안에서 기타를 가지고 나온 것? 아니면 그 모두가? 나는 답을 찾으려 눈으로 빠르게 문제지를 훑는 학생처럼 그의 얼굴을 잠시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예상한 모두가 답인 듯했다. 그리고 그의 사과로 동화의 엔딩은 바뀌었다.   


그 후로 우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우연히 마주치면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주고받았고 용건이 있지 않은 이상 의미 없이 서로의 주변에 머무르지 않았다. 새 학기가 지나고 며칠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의 관계는 채워지지 않은 채 넘어가는 일기장의 페이지처럼 남아있었다. 일기를 쓰지 않아도 시간은 지나가는 것처럼 나의 일상도 매일이 다르게 흘러갔다. 특히 새 학기의 시작과 함께 이어지는 수업과 에라스무스 학생들을 상대로 한 프로그램이 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데 도움이 되었다. 매달마다 학교에서 주관한 여행들이 계획되어있었는데, 약간의 참가비만 있으면 당일치기 또는 주말 동안 독일 근교의 여행을 갈 수 있었다. 그 외에도 학교 학생증으로 비스바덴뿐만 아니라 헤쎈 주의(Hessen 주: 독일의 16개 주중 하나로 비스바덴과 프랑크푸르트 등이 속해있다) 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나는 수업이 없는 날이면 혼자 기차를 타고 근교에 마인츠나 프랑크푸르트로 짧은 소풍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학교 캠퍼스 담벼락에 붙어있는 한 포스터를 보았다. Nacht der Museen(미술관의 밤)이라는 행사가 프랑크푸르트에서 곧 열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티켓을 구매하면 저녁시간에 행사에 참가하는 모든 뮤지엄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고, 그 외에도 다양한 파티나 이벤트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마침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대학교 선배의 지인을 며칠 전에 알게 된 터라 나는 그녀와 함께 약속을 잡고 표를 구매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삼십 분을 걸어가면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뢰머광장이 있고 그곳에서 프랑크푸르트를 가로지르는 마인강을 건너면 강변을 따라 뮤지엄들이 펼쳐져 있다. 해가질 때를 맞춰 도착한 강변은 만개한 목련꽃과 벚꽃의 향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나보다 한살이 많은 J언니와 나는 강변을 따라 걸으며 뮤지엄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중에는 중세시대 미술부터 모던아트까지 엄청난 수의 소장품을 자랑하는 슈테델 뮤지엄(Städel Museum)과 MMK라고 불리는 현대 예술 뮤지엄(Museum für Moderne Kunst)을 비롯해서 리처드 마이어의 건축으로 유명한 응용예술 뮤지엄(Museum Angewandte Kunst)까지 여태껏 책에서나 인터넷으로 봤었던 건물들이 그곳에는 대수롭지 않은 듯 서있었다. 하지만 작품을 보기에는 이 행사는 썩 좋은 기회는 아니었다. 미술관 곳곳에서는 신나는 음악들이 들려왔고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미술관에 다른 이미지들을 입혔다. 사람들은 맥주를 손에 들고 여러 미술관들을 누비며 지인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파티를 즐겼다. 조용하게 집중해서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뮤지엄은 클럽같이 변해버린 뮤지엄의 수보다 현저히 적었다. 우리도 처음에는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 위주로 발이 아파올 정도로 돌아다녔지만 이내 파티 분위기에 젖어 칵테일을 시키고 춤을 추며 이 일탈의 미술관의 밤을 즐기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막차시간이 다가왔다. 정신없이 J언니와 작별인사를 하고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하지만 비스바덴 중앙역까지는 기차로 다시 50분을 달려야 했다. 수없이 시간을 확인하며 초조하게 버스 시간을 머릿속으로 계산에 보았다. 하지만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버스정류장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렸음에도 마지막 버스는 정류장을 떠난 후였다. 이미 시간은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버스정류장 전광판에 쓰인 독일어는 다음 버스가 세 시간 후인 새벽 네시에 온다는 것을 무심하게 알려주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정류장에 앉아 망연자실 주위를 둘러보니 이 시간에 혼자 다니는 또래 여자는 나밖에 없는 듯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리를 지어 수군거리다 이내 킥킥하며 웃음을 짓는 사람들의 소리가 모두 나를 향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늦은 시간에 혼자 택시를 타는 것은 무서웠다. 언젠가 뉴스에서 보았던 온갖 흉흉한 이야기들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핸드폰을 꺼내 독일에서 알게 된 이들의 연락처를 살펴보았다. 에라스무스 학생들은 자동차가 있을 리가 없다. 자동차를 생각하니 A가 떠올랐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A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걸어가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리지만 차를 타면 이십 분 내에 올 수 있는 거리였다. '혹시 기숙사면 미안한데 한 번만 데리러 와 줄 수 있을까?' 너무나 길게 느껴졌던 오분이 지나자 A에게 답장이 왔다. '미안, 나 지금 못가. 택시 타고 와.' 차가웠다. 그의 따듯했던 첫인상이 거짓말같이 느껴졌다. 서운한 마음이 몰려왔지만 일단은 집에 가야 했다. 다시 급하게 연락처를 찾아봤다. 순간 며칠 전 펍에서 축구경기를 보다가 알게 된 독일인 남학생이 떠올랐다. 그는 축구경기 다음날 바로 연락이 와서는 괜찮으면 함께 저녁을 먹고 싶다며 나에게 호감을 표한 터였다. 다짜고짜 부탁을 해야 하는 민망한 마음을 무릅쓰고 그에게 연락을 했다. 그에게서는 바로 답장이 왔고, 이십 분 후 나는 그의 차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기숙사 주차장에 차가 도착하자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진심을 담아 인사를 했다. 그는 마침 자지 않고 있었다고 괜찮으면 자기 플랫에서 맥주를 마시자고 했다. 나에게는 너무 고된 하루였기에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뒤를 돌아 플랫으로 향했다. 순간 고개를 들어 내 플랫이 위치한 건물의 위쪽을 바라보니 부엌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는 A가 보였다. A의 시선 끝에는 내가 아닌 차의 주인이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A의 차는 주차장에 고요히 주차되어있었다.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플랫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막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A와 마주쳤고 A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왔네? 택시 탄 거야?" 그는 모른 척 질문을 했다.

"아니, 마침 좋은 친구가 데리러 와 줘서." 나는 되도록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을 했다.

"아 그래, 잘됐네. 잘 자."

"응. 너도."

조금은 씁쓸한 기분으로 대화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왔다그리고는 씻지도 않은  바로 침대로 향했고  땅으로 꺼지듯 잠에 들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한치의 미련조차 A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며칠 후에는 고마움을 표시할 겸 그 밤에 데리러 와 주었던 독일인 남학생을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졸업논문을 쓰고 있다는 그는 큰 덩치에 순박한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사실 그 기류는 우리 둘 사이가 아닌 그에게서 일방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의 차를 타고 함께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오늘 나와의 만남을 위해 방을 정리했으며, 내가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냉장고를 맥주와 와인으로 채워놓았다고 했다. 부담스러웠지만 술을 한잔 더 하자는 그의 말을 선뜻 뿌리치지 못했다. 23살의 나는 어디까지가 예의이고 어디까지가 호의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그의 호의를 예의로 뿌리치지 못한 채 그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어딘가 들떠보였고, 나는 점점 그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새로 산 조명을 자랑하고 싶다며 그는 조명을 조금 어둡게 바꾸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다. 조명을 바꾼 후 다시 자리에 앉은 그는 조금 더 가깝게 몸을 밀착해왔다. 그리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맞추려 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내 머릿속에는 A가 떠올랐다. 그러자 더 이상 이 자리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그에게 몸이 안 좋다고 하고 도망치듯 기숙사 건물로 돌아갔다. 플랫 안으로 들어서 복도의 방문들을 쳐다봤다. A의 방문은 조금 열려있었다. 인기척을 내지 않고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며칠 전 사놓은 라면 하나를 끓이고는 소주병을 열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소주 한 병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무렵 누군가 부엌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엌 창문에 비친 실루엣을 통해 A임을 알았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A가 내 곁으로 다가와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민이 있는가 보네? 혼자 보드카 먹는 여자애는 처음 봐"

"뭐 그런 셈이지"

"남자문제야?"

"그럴지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A는 잠시 방으로 들어가는 듯하더니 맥주 한 캔을 들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왔다.

 

"혼자 먹으면 아무래도 슬프잖아" 그는 위로하듯 말했다.

 

나는 소주의 마지막 잔을, A는 맥주 한 캔을 말없이 비웠다. 우리는 건배도 하지 않고 각자 서로의 술을 털어 넘겼다.

 

A가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것은 그날 밤 이후로 일주일이 채 안되었을 때였다. 그날은 룸메이트를 통해 알게 된 다른 플랫의 외국인 여자 친구들과 함께 파스타를 만들어 먹기로 한 날이었다. 막 식사를 하려던 찰나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다. '나 오늘 친구랑 같이 요리하려고 하는데 저녁에 시간 돼?' A의 메시지였다. 순간 가슴이 떨려왔다. 하지만 다시 기대를 갖기에는 짧은 텍스트로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미안, 나 이미 친구들이랑 밥 먹고 있어.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같이 먹자.' 나에겐 확신이 필요했다. 두 번째로 그가 나를 초대한 것은 그 후로 나흘 후였다. 사실 그날은 어쩐지 그에게 연락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일부로 배고픔을 참아가며 군것질 따위로 저녁식사를 미루고 있었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아직 밥 안 먹었으면 B의 플랫으로 와'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지만 나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답장을 하고 B의 플랫을 향해 한 층 위로 올라갔다. B의 플랫 부엌에 들어서니 A와 B가 마트에서 사 온 레토르트 제품을 선반에 늘어놓은 채 연구를 하듯 진지하게 그것들을 조리하고 있었다. 팬에 넣고 데우기만 하면 되는 것은 요리를 많이 안 해본 나도 알 수 있었지만, 그들의 심각한 얼굴을 보아하니 괜스레 웃음이 났다. 음식의 맛은 냉동식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즐겁게 식사를 했다. 그렇게 A와 B 그리고 나까지 우리 셋은 일주일에 3번을 연달아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저녁식사 후에는 A혹은 B의 방 안에서 함께 빔프로젝트를 틀어놓고 영화를 보았다. 독일어를 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그 둘은 매번 영어로 영화를 틀어주었다. 사실 빠르게 흘러가는 영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냥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셋이 함께하는 저녁이 잦아지자 A와의 관계도 조금 편해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렇게 친구가 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 번째 식사는 조금 달랐다. B는 그날 유난히 피곤하다며 식사를 끝나자마자 방으로 들어갔다. 하는 수 없이 나와 A는 자리를 파하고 함께 플랫으로 내려왔지만 짧게 끝난 밤이 아쉬웠다. 나는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부엌을 맴돌았다.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이유 없이 부엌에서 서성거리기가 애매해지자 아주 천천히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A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방에 와인 하나를 발견했어. 같이 영화 보면서 마실래?" 

뒤돌아 A의 긴장한듯한 표정을 보자 나는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A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두 달 뒤 기숙사 밖의 나무들이 총천연색의 옷으로 갈아입고 작은 꽃나무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만개를 할 무렵 A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던 나는 문득 생각난 듯 그에게 물었다.

"나는 너에게 뭐야?"

 놀란 듯 잠시 나를 쳐다보던 A는, 케이크와 와인을 들고 부엌에 들어선 그날처럼 환한 미소로 답했다.

"당연히 내 여자 친구지."

그렇게 우리의 동화는 다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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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독일, 이방인으로 다시 서기

한국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다 어느 날 마음이 펑하고 터져버린 저자는 문득 새로운 경험을 찾아 독일로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 어렵게 찾은 보금자리에 들어선 순간 남자들이 우글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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