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사진작가와의 만남부터 아를 국제사진전의 인상까지]
사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내가 셔터 한번 제대로 눌러보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진 수업의 기말 과제는 세 개의 다른 콘셉트로 인물을 주제로 촬영을 한 후 그 결과물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제출일이 코앞에 닥쳐서 쫓기듯 작업하고 싶지 않았던 터라 일찌감치 모델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첫 모델은 칠레에서 온 C라는 에라스무스 학생이었다. 까맣고 긴 곱슬머리에 작은 체구, 구릿빛 피부의 C는 평소 수줍은 성격과는 달리 파티에서는 늘 물 만난 물고기 같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영어가 서툴러서 주로 칠레에서 온 학생들이나 멕시코 친구들과 함께 어울렸는데, 나와 종종 마주친 적은 있지만 제대로 대화를 해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던 터에 어느 날 한 칠레 학생의 생일파티에서 그녀와 마주칠 수 있었다.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 내 과제에 대해 설명하고 모델이 되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놀라는 듯했으나 설득이 이어지자 이내 승낙을 해주었다.
"하지만 나 모델 같은 거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나도 촬영은 처음이야, 그래도 재밌을 거야"
"그럼 한번 해보지 뭐."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촬영이 기대된다고 말하였다.
그녀의 승낙에 힘입어 나는 며칠 동안 콘셉트를 정하고 자료 정리를 하고 그녀가 입을 옷을 구비해 놓았다. 한편으로는 페이스북을 통해 그녀와 촬영일자와 장소를 협의했다. 그렇게 우리는 5월 말의 어느 오후에 나의 기숙사 방에서 사진 촬영을 하기로 결정했다. 약속시간이 조금 남았을 무렵 기숙사 플랫의 초인종이 울렸다.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혹시나 촬영에 도움이 될까 싶어 자신이 직접 몇 가지 옷을 준비해왔다고 했다. 촬영이 정해진 후 그녀가 카메라 앞에서 쑥스러워하거나 소극적으로 임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했던 나는, 그녀의 준비성에 감동을 받았다. 촬영에 앞서 그녀에게 콘셉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사진을 보여준 후, 그녀가 콘셉트를 이해한 것 같자 지체하지 않고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금방 끝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세 시간이 지나서야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착장을 새로 할 때마다 나는 그녀에게 결과물을 보여주었고 그녀가 만족하면 바로 또 다른 옷을 건네주고 셔터를 누를 준비 했다. 카메라도 조명도 학교에서 대여가 가능했지만 독일어로 된 서류를 채우고 이곳저곳을 다니는 것은 당시 나에게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결국 나는 내가 들고 온 미러리스 카메라에 기본 단렌즈를 달고는 자연광에 의지해 촬영을 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긴장한 듯 나의 지시에 조심스레 포즈를 취하던 그녀는 촬영이 점점 무르익자 스스로 포즈도 취하고 제안도 하는 등 한결 편안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파티에서 보았던 그녀의 눈빛이 잠시 렌즈에 반사되어 보이는 듯했다. 세 시간의 촬영이 끝나고 그녀는 다시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갔다. 나는 방안에 혼자 남아 오늘 촬영한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열악한 장비에 비해 촬영 결과물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아마도 초보 모델과 초보 작가의 열정이 그 안에 담겨서인 듯했다.
두 번째 촬영은 사진 실습 여행에 동행했던 Z와의 작업이었다. 어학수업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나는 캠퍼스 앞 계단에서 앉아 있는 Z를 처음 보았다. 터키에서 온 그녀는 갸름한 얼굴에 하얀 피부, 또렷한 콧날에 위로 살짝 올라간 눈매를 가진 호탕하고 솔직한 성격을 가진 멋진 여성이었다. 그녀는 딱 붙는 레깅스에 군화 같은 워커를 신고 자신의 몸집보다 큰 후드티에 어두운 색 비니를 쓰고 계단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진하게 그려진 아이라인에 대조되는 화장기 없는 입술에는 담배 필터를 물고 가늘고 하얀 손으로는 담배를 말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코에 피어싱을 하고 있었고 오른쪽 중지 손가락에는 작은 타투가 있었다. Z는 눈은 담배를 마는 일에 집중하면서도 주변에서 장난을 치는 남자들에게 간간이 웃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매료시킨 이유는 무엇보다 그녀의 쾌활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녀에게 무례하거나 선입견이 담긴 말을 건넬 때면 그녀는 차가울 정도로 단호함을 보여주곤 했다. 나중에 그녀와 더 친분을 쌓은 후 물어보니, 그녀는 오히려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곤란한 일을 종종 겪었다고 했었다. 중지에 새긴 타투는 더 이상 남들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게끔 스스로를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새긴 것이라 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Z도 독일에 온 후 독일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이야기가 잘 통했고 때로는 서로 연애상담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를 떨기도 했었다. 나보다 한 살이 어린 그녀는 주관도 세고 자기주장도 강했다. 그렇지만 또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인내심 있게 들어줄 줄 알았고 나의 고민에는 같이 눈물을 흘려주기도 했었다. 그녀와 점점 친해질수록 나는 그녀의 겉모습에 가려진 그녀의 여린 내면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를 더 알게 되자 두 번째 모델은 그녀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수업을 듣는 그녀였기에 나는 장황한 설명 없이, 그녀에게 모델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나 또한 그녀의 모델이 되어준다는 조건을 걸며 웃으며 한 번에 승낙했다. 나는 속으로 역시나 그녀답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촬영은 첫 번째보다 수월했다. 나는 우선 촬영 콘셉트에 맞춘 의상과 소품을 준비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과 애연가인 그녀를 위해 넉넉한 담배와 재떨이도 구비해 놓았다. 우리는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치면서 즐겁게 촬영을 이어나갔다. 그녀 또한 디자인을 공부하는 중이었기에 콘셉트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높았고, 촬영이 시작되면 눈빛이 바로 변할 정도로 몰입도도 좋았다. 두 번째 촬영은 콘셉트 수가 더 많았음에도 두 시간이 채 안되어서 끝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번째 촬영 또한 마무리되었다.
다시 사진 여행으로 돌아와, 여행 초반 교수와의 논쟁이 벌어진 이후 여행 중에 다시 교수와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교수는 공식적인 일정 외에는 늘 아침 일찍 캠핑장을 벗어나 저녁 무렵 다시 돌아오곤 했으니 개인적으로 마주칠 기회 또한 적었다. 종종 마주칠 때면 서로 간단한 목례만 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인 학생들도 그의 무례하고 이기적인 태도에 혀를 내두르기 시작했고, 나에게 응원의 눈빛을 보내는 학생도 생겼다. 나도 더 이상 교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어른스럽지 못한 어른을 하나 더 만난 것이라 생각했다.
여행의 넷째 날에는 교수가 사전에 섭외해 놓은 Amedeo Turello라는 사진작가와의 세미나가 있었다. 그는 큰 키와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는데 하얀색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어서 나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인상을 주었다. 패션 사진가로 나름 명성이 높은 Amedeo는 독일에서 온 우리에게 삼십 분 정도의 세미나를 정성껏 해주었다. 막바지에 교수는 마치 늦깎이 학생처럼 열성적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의 질문이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자 Amdedo는 즉흥적으로 밖에 같이 나가 자신이 학생들을 한 명씩 찍어주면서 직접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다. 교수는 감격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몇몇 학생들은 환호성을 외쳤다. 강의가 있던 건물을 나서서 우리는 아를의 낡은 도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게 되었다. 사진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던 몇몇 친구들은 그의 손짓 하나 말 한마디 하나에 매료된 듯 보였다. 그들은 그에게 다가가 그의 카메라를 한 번만 만져보아도 되겠냐고 물었고 그는 신줏단지 내어주듯 조심히 자신의 카메라를 보여주기도 했었다. 모두들 유명한 사진작가가 자신을 찍어준다는 것에 들떠있는 반면, 평소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나는 그가 얼마나 유명한지, 유능한 지를 떠나 사진모델이 돼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제야 나의 모델이 되어주었던 C와 Z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내 차례가 돌아오고 주변에서 나가보라는 이야기에 쭈뼛쭈뼛 그의 카메라 렌즈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나를 관찰하던 그는 나에게 후드티의 모자를 써보라고 이야기하더니 나의 옷매무새를 잠시 고쳐주었다. 나는 잠시 그의 눈이 어딘지 매서워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게 나의 사진을 마지막으로 Amedeo와의 약속된 시간이 모두 끝이 났다.
다섯 번째 날은 전시장에 가서 종일 전시를 보는 일정이 우리에게 마련되어있었다. 한 마을이 모두 전시장으로 변모한 듯 보이는 아를 국제 사진전의 규모는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났다. 직접 방문해보니 유럽 최대의 사진축제라는 이야기가 실감이 났다. 미술관이나 전시관에서 하는 사진전이 아니라 마을의 각기 다른 건물에서 각자의 콘셉트에 맞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각자의 관심과 전시를 보는 속도에 맞추어 일행은 전시장 곳곳으로 흩어졌고 나도 혼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감상했다. 전시장에는 패션과 상업사진뿐만 아니라 굉장히 다양한 주제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극적으로 효과를 준 사진도 있었고, 단 하나의 후보정도 없이 필름 카메라로만 촬영된 사진들도 있었다.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나체도 있었고, 나이가 지긋한 노년의 인물을 적나라하게 담은 이미지도 있었다. 모델이 되기에 적합한 상은 따로 없어 보였다. 그저 작가가 원하는 모습을 그에 걸맞은 카메라와 필터를 사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가 최적으로 담길 수 있는 빛을 조정해서 피사체를 담는 것이 사진 촬영이었다. 나는 몇 번의 세미나와 실습에서보다 그 크나큰 전시장에서 사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순간을 담는 일의 의미를 알아 가는 느낌을 받았다.
여행 일정 중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미처 끝내지 못했던 촬영을 마무리했다. 캠핑장 주변에는 온통 작은 숲들이 펼쳐져 있었고 곳곳에는 낡은 캠핑카들이 주차되어 잊혀가고 있었다. 사진 촬영할 곳을 찾아 숲을 지나 개울이 흐르는 곳으로 오백 미터 정도를 걸어가다 보니 낡은 성벽과 다리들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우리의 촬영지가 되었다. 여행 전에 두 번의 촬영을 끝내고 왔지만 나에게도 역시 마지막 세 번째 촬영이 숙제처럼 남아있었다. 몇몇 일행은 캠핑장이나 밤에 시내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에게 모델이 되어주길 물어보기도 했었다. 심지어 교수는 해변에서 마주친 막 스무 살이 넘은 두 명의 여자들에게 모델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었다. 그녀들은 쾌활하게 웃으며 자신들은 지금 히치하이킹을 해서 여러 도시를 여행 중인데 어느 도시까지 차를 태워주면 흔쾌히 모델이 되어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연락처를 남기고는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다행히도 세 번째 모델을 구하기 위해 지나가는 행인이나 거리의 낯선 이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사진 수업을 함께 듣는 독일인 학생 중에는 Y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여행 중에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적이 없었다. 상냥한 목소리에 수줍은 태도와는 달리 그녀는 늘 몸매가 드러나는 화려한 패턴의 옷차림을 했었다.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겨 나는 Y는 언젠가 자신의 엄마는 이탈리아 아빠는 독일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그녀는 독일인 학생들 중에서도 유독 우리에게 친절했지만 생각에 잠겨있을 때는 어딘가 외로운 듯 보였다. 그녀의 분위기에 사로잡힌 나는 여행 중에 모델이 되어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녀는 잠시 나를 골똘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거절하려는 듯 이야기를 꺼내자 조급해진 나는 지난 두 번의 촬영 결과물을 보여주고 내가 왜 그녀를 모델로 쓰고 싶은지, 그녀와 어떤 사진을 찍고 싶은지 설명해주었다. 그녀가 이내 승낙해준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내 간절함과 그녀에게 절박하게 물어보던 순수함 어느 중간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볼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모델과 작가가 되어주며 뜨거운 여름날의 여행을 바쁘게 보냈다. 나 또한 독일인 학생과 Z의 모델이 되어주었고 누군가 촬영 중 도움이 필요할 때면 기꺼이 어시스턴트가 되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던 사이 길게만 느껴졌던 7일간의 여행의 끝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독일로 돌아가기 전 날은 다 함께 아를의 해변을 가게 되었다. 교수는 며칠 전 본인의 촬영을 위해 섭외한 두 모델을 데리러 가느라 먼저 출발했고 나와 다른 일행들은 다시 지프차에 몸을 쑤셔 넣고는 아를 해변으로 향했다. 에어컨이 고장 난 지프차에 앉아 대략 이십여분을 달리자 우리 앞에는 아를 해변 근처의 자연보호구역이 나타났다. 창밖을 살펴보니 늪지대와 암석들이 어우러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곳곳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들이 무리를 지어 물고기를 사냥하는 듯 보였다. 아를 해변은 내가 유럽에서 마주친 첫 해변이었다. 암석과 모래사장 그리고 갯벌이 어우러진 그곳은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두운 색깔의 모래가 깔린 해변을 따라 일행은 잠시 홀린 듯 자유를 만끽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반나절, 그 시간 안에서 각자 촬영을 하던 휴식을 취하던 자유였다. 이미 세 번의 촬영을 모두 끝낸 나와 Z는 해변가에 앉아 아득히 먼 지평선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새로운 풍경이었다. 그래도 이런 풍경을 보았으니 나쁘지만은 않았던 여행이 아니겠냐며 Z와 나는 모든 것을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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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독일, 이방인으로 다시 서기
한국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다 어느 날 마음이 펑하고 터져버린 저자는 문득 새로운 경험을 찾아 독일로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 어렵게 찾은 보금자리에 들어선 순간 남자들이 우글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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