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눈의 남자 친구와 그의 부모님]
여름이 무르익어가는동안 플랫메이트이자 남자친구인 A와의 관계도 순항 중이었다. 둘의 영어실력이 각자의 모국어 실력에 미치지는 못 했기에, 의사소통에 어느정도 제약은 있었지만, 따듯한 마음을 서로에게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다. 독일어로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마냥 좋아하는 나와 한국어는 마치 도형처럼 생겼다고 어린아이처럼 감탄하는 A는 잘맞는 짝이었다. 게다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둘만의 언어 또한 풍부해졌다.
지금까지 본 A는 웃음이 많았지만 신중했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만큼 친구와 가족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A는 나와 만남을 시작한 이후로도 매일은 아니지만 부모님께 안부전화를 하고 주말마다 부모님 댁에서 건강한 가정 음식을 한 보따리씩 가져오곤 했다. 생일을 보낸지 얼마 안돼서 나는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앉아 모니터를 향해 돌아 앉아있는 그에게 문득 질문을 던졌다.
"너네 부모님은 어떤 분이셔?"
질문을 들은 A가 뒤돌아 나를 봤다. 그리고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불시에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는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조금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그러더니 A는 자신의 부모님들은 독일인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님 아버님 각자의 조부모들이 카자흐스탄으로 이민 가서 서로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두분은 카자흐스탄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다 소련 붕괴쯤 다시 독일로 이민을 오게 되었고 그게 다섯살 때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A와 네 살 많은 누나는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쓰지만, 부모님과 대화할 때는 러시아어를 쓴다고 덧붙였다. 그 이야기를 듣자 문득 기숙사 방에서 창문 너머로 본 그의 부모님이 생각났다. 다정하게 A에게 음식을 싸주시며 포옹하던 두분은 인자한 얼굴을 하고계셨다. 부모님 이야기를 하는 A의 얼굴도 밝은 것을 보니, 그는 부모님과 좋은 관계를 갖은 듯해 보였다. 불현듯 그의 부모님을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A에게 물었다.
"너 이번 주말에 부모님네 간다고 했지?"
"응 아마도? 왜 주말에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나도 같이 가도 돼?"
질문을 들은 A는 순간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초록빛이 섞인 파란 눈동자가 평소보다 조금 커지더니 이내 눈매가 초승달 모양으로 변하며 반짝였다. A는 잠시 미소를 지으며 천진한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나는 서둘러 그냥 호기심에 너의 부모님을 만나 뵙고 싶은 거니 부담스러우면 당연히 거절해도 된다며 얼버무렸다. 당연히 함께 와도 된다며 부모님도 좋아하실 거라고 말하는 A의 얼굴은 어딘가 전보다 상기되어 보였다.
돌아온 주말 함께 A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차는 삼십 분이 넘게 달려 풍력발전소가 사방으로 펼쳐지던 지역을 지나고 나니 포도밭 맞은편으로 일자로 곧게 뻗은 이차선 도로가 나왔다. 이차선 도로의 처음부터 끝까지 자작나무가 양옆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시원한 바람이 나뭇잎을 사방으로 가로지르며 지나가자 자작나무들 사이에서 자그마한 박수갈채 소리가 나는 듯했다. 마을 입구를 지나 세 블록을 지나자 오른편에 부모님의 집이 보였다. 연노랑색의 아담한 이층 집이었다. 집 앞의 왼쪽에는 정원으로 이어지는 잔디밭 길이 나 있었고 그 반대쪽인 오른편에는 차고지를 사이에 두고 옆집과 마주 보고 있었다. 대문으로 이어지는 한층 높이의 계단에는 장미 꽃봉오리들이 기대듯 감싸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 대문 옆에 달려있는 종을 울렸다. 종소리가 두 번째 울림을 마치기도 전에 집 안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모님은 한달음에 달려 나오셨다. A가 짧게 포옹을 하며 자신의 부모님과 인사를 마치자, 모두의 시선이 그 뒤에 어색하게 서있는 나에게로 쏠렸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앞으로 한 발짝 나가 부모님 두 분께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드렸다. 나를 바라보는 A 어머니의 눈동자는 반가움으로 반짝이는 듯했다. 그 옆에 묵묵히 서계시던 A의 아버지는 나의 악수를 투박한 손으로 받아주시며 환영의 인사를 건네셨다. A는 눈동자 색깔은 어머니의 초록색과 아버지의 청색을 반반씩 빼닮은듯 했다. 입구에 선채로 서로 인사를 마치자 어머님은 우리를 부엌으로 안내하며 배가 고픈지 물으셨다. A는 아직 수줍어하는 나를 보더니 집안을 구경시켜주겠다며 안으로 내손을 이끌었다. 집안은 구석구석 먼지 쌓인 곳 하나 없이 깔끔했고, 소탈한 가구들은 제자리에 조화롭게 놓여있었다. 그런 덕에 집의 내부는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커 보였다. A는 아직 이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집의 모든 수리가 끝나지 않았다고 설명하면서 집안 곳곳 자신이 일을 도운 곳을 짚어가며 뿌듯해했다. 거실을 지나 테라스로 나가니 부모님이 부지런히 일구신 텃밭과 정원이 보였다. 정원의 오른편에는 토마토, 오이, 호박 등이 줄을 지어 심어져있었고 왼편에는 사과나무와 벤치가 잔디밭 위에 고즈넉이 놓여있었다. 테라스에서 정원으로 이어지는 경사에는 딸기가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몇 가지 샐러드와 러시아식 점심식사를 차려주셨다. 이미 몇 번 A를 통해 어머니의 요리를 맛본 터라 모든 게 입맛에 잘 맞았고 맛있었다. 부모님은 태연하게 음식을 잘 먹는 나를 잠시 놀란 듯 쳐다보시더니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A의 부모님의 환대로 식사자리의 분위기는 내내 화기애애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유머와 웃음이 많으셨고 대화는 누구 한 사람의 주도가 아닌 모두가 즐겁게 참여할 수 있었다. 내내 A가 러시아어를 하시는 부모님을 영어로 통역을 해주어야 했지만 그가 매번 기꺼이 즐겁게 부모님의 이야기를 전해주었기에 언어의 장벽도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이어서 차와 간식들이 나왔다. A는 러시아 사람들은 유독 군것질을 좋아한다며 농담을 했고 그에 A의 어머님은 미소와 함께 A가 좋아하는 간식을 꺼내 줌으로써 그의 농담에 대처하셨다. 하지만 나는 이미 식사에 배가 터질 듯 부른 터라 차외에 다른 간식거리를 쉽게 못 넘기고 있었다. A의 어머님께서는 그러면 기숙사에 가져가라며 음식과 간식들을 싸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함께 차를 타고 다시 기숙사로 향했다.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A는 조심스레 오늘 어땠냐며 물으며 약간 흥분해서는 자신의 소감부터 말했다.
"우리 부모님이 이렇게 누군가를 처음부터 좋아하시는 건 처음 봤어! 너는 오늘 어땠어?"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하는 척하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답했다.
"부모님을 뵙고 나니 저렇게 훌륭한 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아들에게 더 신뢰가 가는데? 부모님을 봐서라도 더 만나봐도 되겠어!"
나의 대답을 들은 그는 황당한 듯 소리 내어 한참을 웃더니 뿌듯하게 대답했다.
"그럼 우리 부모님께 감사드려야겠네!"
A는 잠시 나의 손을 꽉 쥐었고, 나 또한 그의 손을 지긋히 마주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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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독일, 이방인으로 다시 서기
한국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다 어느 날 마음이 펑하고 터져버린 저자는 문득 새로운 경험을 찾아 독일로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 어렵게 찾은 보금자리에 들어선 순간 남자들이 우글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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