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견문록

11 - 생일이 뭐 별건가

비바제인 2023. 3. 22. 21:11

[독일에서 맞은 스물세번째 생일]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기 전 6월 초의 어느 오후 나는 기숙사 방안 창가에 앉아 골몰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창 밖에는 여름이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의 도착을 알리고 있었다. 길어진 여름 해와 함께 두 기숙사 건물 사이에 서있는 이름 모를 나무들은 여름 바람의 장단에 맞춰 살랑살랑 몸을 흔들었다. 가지마다 이파리가 빼곡히 달려있었다. 그 위로는 청설모들이 짝을 맞춰 오르락내리락 곡예를 부렸다. 나무 그늘 아래엔 기숙사 학생들이 삼삼오오 계단에 앉아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함께 노래를 들으며 드디어 찾아온 독일의 여름날을 만끽했다.

그렇지만 나는 온순해진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이 주는 행복을 만끽할 수 없었다. 6월이 왔다는 것은 곧 내 생일이 다가온다는 것을 뜻했다. 머리 뒤에 깍지를 끼고 침대 머리에 발을 올리고 누워서 이번 생일은 무척 외롭겠다하는 생각을 들었다. 가족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처음 맞는 생일이었다. 미역국을 끓여주던 엄마도 용돈을 주시던 아빠도 곁에 없었다. 물론 타지에서의 생일을 더 신나게 보내는 학생들도 있었다. 함께 온 나라의 친구들이 생일 주인공에게 고향음식을 해주거나 발벗고 나서서 생일파티를 주관해 주는 경우도 많았다.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같은 대학교에서 비스바덴으로 온 학생들은 총 일곱 명이었다. 그중 디자인 학부생은 나와 룸메이트를 포함해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세 명이었고, 다른 넷은 경영학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다른 학부 사람들과는 독일어 수업이 시작될 때쯤 안면을 트게 되었지만 출신 국가와 학교를 제외하면 공통점도 희미해서 지인 이상의 사이가 되기에는 어려웠다.

'뭐, 생일이 늘 시끌벅적하라는 법 있나? 사실 한국이었으면 오히려 감흥 없이 지나갔을지도 몰라.' 외로운 마음이 상황을 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다.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게 생일을 앞두고 늘 찾아오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울함 때문일 수도 있다며 울적한 기분을 잊어버리려고도 노력하며 지냈다.

 


생일 이틀 전이었던 그날은 창밖이 눈부시게 빛나는 화창한 여름날의 오전이었다. 새로 단 하얀색 면 커튼이 살짝 열린 창문에서 들어온 바람과 춤을 추고 있었다. 이미 잠은 깬 지 오래지만 나른한 기분을 더 즐기고 싶어서 잠시 더 눈을 감고 누워있기로 했다. 한편으론 며칠 전부터 쉴 새 없이 괴롭히던 생각들을 매듭짓고 싶었다. 걱정들을 하나씩 짚어가다 문득 눈을 뜨며 생각했다. '아니 누가 챙겨주기를 기다려야 하나? 어차피 내 생일이고 이렇게 해외에서 맞는 생일도 흔치 않을 텐데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지', 호기로운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옆을 바라보니 룸메이트는 이미 일어나 과제를 하는 중이었다. 누운 상태로 고개만 돌려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나 생일 파티할까 봐, 우리 플랫에서 하려는데... 괜찮을까?"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더니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 방에 누가 들어오는 건 아니지?"

"그럼. 그건 나도 싫어. 부엌에서 하려고 해"

그녀는 다시 곰곰이 생각을 하는 듯 말이 없더니 이내 관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난 괜찮아. 재밌겠다"

그렇게 함께 사는 이의 동의를 구하자마자 나는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바로 페이스북 에라스뮈스 그룹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안녕, 이번 주에 내 생일파티를 하려고 해. 만약 날 알거나 에라스뮈스 학생이거나 혹은 캄피 에리에 산다면 넌 이미 초대된 거나 다름없어! 몇 가지 한국음식을 할 거니까 먹고 싶은 사람은 8시까지 와줘. 그리고 각자 마실 음료 들고 오는 거 잊지 마!'

짧은 글을 순식간에 쓰고 고민하지 않고 바로 업로드 버튼을 눌렀다. 독일에 온 이후 처음으로 그룹에 남긴 글이었다. 커피를 마시러 공동부엌에 나가니 부엌에는 F와 J가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둘에게 다가가 이를 알리니 모두 반색을하며 괜찮다고 허락을 해 주었다. 순식간에 플랫 메이트 대부분의 허락을 받아내자 신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부엌을 나서 A의 방으로 향했다. 문은 살짝 열려있었다.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A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 A는 하던일을 멈추고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곁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방 안으로 들어가 그의 컴퓨터 책상 옆 왼편 방 중앙에 놓인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있잖아, 나 내일모레 생일인 거 알지?" 

"그럼 알고 있지, 왜 그새 까먹었을 까 봐?" 

"그래서 나 오늘 아침에 생일 파티하기로 결정했어"

"응. 알고 있어"

"어떻게?" 

"부엌에서 그렇게 크게 얘기하는걸 못 들었을까 봐? 그리고 방금 페이스북에서도 봤어"

"아 그렇구나... 괜찮지? 우리 플랫에서 파티해도?"

"그럼. 내가 도와줄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그는 자상한 아빠처럼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의 뺨에 살짝 입맞춤을 하고 그의 방을 나왔다.

다시 노트북을 열어보니 이십여분 사이에 좋아요와 댓글이 달려있었다. 평소에 나름 친분이 있던 에라스뮈스 친구들이었다. 오후가 되었을 때는 좋아요가 스무 개가 넘었고, 나는 그걸로 말미암아 대략 스무 명 정도는 오겠지 싶었다. 남은 시간은 이틀뿐이었고 할 일은 많았지만 걱정은 하나도 되지 않았다. 한국음식 서너 가지는 굳이 도움을 안 받아도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 시내에 나가 요리를 할 재료를 사고 옷가게를 들려 생일파티에 입을 옷을 쇼핑했다. 생일날에는 비싸지는 않더라도 꼬까옷 한벌쯤은 사 입고 싶었기 때문이다. 할인 코너에서 옷을 고르다 하얀색 티셔츠에 파란색 나염으로 알파벳 'A'가 적힌 옷을 발견했다. 문득 A가 생각이 났다. 마치 나를 위해 그 자리에 놓인 옷같이 느껴졌다. 티셔츠를 발견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이어서 어두운 감색의 치마를 발견했다. 티셔츠와 치마를 나란히 놓고 보니 만족스러웠다. 한 손에는 장본 음식들과 다른 손에는 방금 산 옷가지를 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숙사로 향했다. 싱그러운 녹음과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며칠 전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듯했다.

 

생일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 일찍 수업이 있는 룸메이트는 생일 선물을 급하게 건네주고는 방을 나섰다. 그녀가 건넨 조그마한 라벨이 붙은 유리통에는 뮤즐리가 가득 담겨있었다. 라벨에는 '제인 생일 기념'이라는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나 또한 아침 일찍 수업이 있던 터라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학교로 향했다. 그 후 점심시간 조금 전에 집에 돌아와 서둘러 전날 사온 재료들로 한국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요리를 마치고 보니 약속된 시간까지는 두 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 햇빛이 비추는 복도를 지나 다시 부엌으로 나가보니 A와 F가 부엌에 나와있었다. A가 자신의 방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기를 제안했다. 그렇게 우리 셋은 사람들을 기다리는 동안 A가 사 온 맥주를 마시고 사진을 찍으며 생일 파티에 앞서 흥을 돋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플랫의 초인종이 울렸다. 한국인 교환학생 중 하나인 H였다. 나는 H를 부엌으로 안내했다. 첫 손님이 들어오자 파티가 곧 시작될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이어서 한국인 교환학생 중 두 명의 유일한 남자들이 플랫으로 들어왔다. 한 명은 나에게 자신이 다룰 줄 아는 악기를 연주해주겠다며 악기를 들고 들어왔지만, 다른 한 명은 슬리퍼를 신고는 빈손에 음료도 들고 오지 않은 듯해 보였다. 평소의 친분과 그의 옷차림으로 미루어보아 나는 그가 잠시 인사만 하고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부엌 안쪽으로 들어와서는 테이블에 놓인 완성된 요리 위에 덮혀져 있던 랩을 자연스럽게 벗기더니 허락도 구하지 않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그 또한 파티에 온 손님이었다. 내가 이도 저도 못 하는 동안 그는 음식의 절반 이상을 비워버렸고 파티가 시작도 되기 전에 바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파티는 이제 삼십 분도 채 남지 않았는데 공을 들여 준비한 음식은 어이없게도 이미 반이 사라진 것이다. 속상한 마음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으니 가만히 나를 보고 있던 A가 잠시 방안으로 나를 불렀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괜찮아? 왜 그래?"

"내가 만든 음식을 그는 고맙다는 인사도 남에 대한 배려도 없이 먹어버렸어. 그리고 그는 정말 음식만 먹고 다시 가버렸어.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너무 화가 나"

"제인, 네가 좋은 마음씨로 생일파티에 올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한 건 좋은 일이야. 하지만 그들은 너를 축하해주러 오는 거지 음식만 먹으러 오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 너무 속상해하지 마. 아마 그 한국인 남자도 고향 음식이 너무 그리웠나 보지. 마침 근데 너의 요리가 너무 맛있어서 멈출 수가 없었던 걸 수도 있어. 그러니 좋게 생각하자. 파티는 겨우 이제 시작인걸?"

그 순간 나는 혹시 A가 마법을 부리는건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그를 따라 미소를 짓자 그는 사람들이 오는데 주인공이 손님을 맞아야하지 않겠냐며, 내 손을 방 밖으로 이끌었다. 복도로 나가보니 열려있는 플랫의 문으로 사람들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친분이 있던 친구들 말고도 얼마 전 알게 된 친구들도, 생전 처음 보는 친구들도 있었다. 플랫 안이 꽉 차자 사람들은 복도 바닥이나 계단 밖까지 나가 자리를 잡았다. 독일인 버디가 직접 구운 케이크 위에 촛불을 켜고 케이크를 자르면서 파티는 시작되었다. 사방에서 에라스뮈스 친구들이 축하의 말을 해 주었다. 지금까지도 그때만큼 다양한 언어로 생일축하 인사를 받을 기회는 없었다. 

12시가 지나자 나의 공식적인 생일이 끝이 났다. 기숙사가 미어 넘치도록 와주었던 친구들도 모두 각자의 플랫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배웅을 해주러 잠시 기숙사 밖에 나갔던 나는 밖에서 술을 마시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생각보다 늦게 플랫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썰물처럼 손님들이 빠져나간 부엌은 어쩐지 평소보다 더 적막해 보였다.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부엌은 이미 룸메이트와 A가 정리를 해둔 상태였다. 방문을 살짝 열고 룸메이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잠시 인사를 하러 A의 방으로 들어갔다. A는 피곤한 듯 하품을 깨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A는 자신의 옷장을 가리키며 열어보라고 말했다. 의아한 듯 A를 쳐다보던 나는 천천히 옷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작은 선물 상자가 놓여있었고 그 안에는 주황색 원피스가 들어있었다. 며칠 전 시내에 함께 갔다 같이 본 원피스였다. 

"생일 다시 한번 축하해. 오늘 너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야 하는 게 아쉬웠지만 네가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 오늘 어땠어?"

나는 잠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내가 용기내서 이루었다고 생각한 생일파티는 사실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만들어준 날이었다. 그리고 A는 그 누구보다도 내 행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주었다. 파티 중간중간 A는 음악을 담당하면서도 빈 병들을 치우며 뒷정리까지 도맡아 해 주었다. A를 찾으려 주위를 둘러볼때마다 그는 항상 나를 보고 있었다.  

"너무 행복했어! 그리고 선물도 정말 마음에 들어. 하지만 이번 생일 최고의 선물은 역시 너인 것 같아"

그렇게 내 스물세번째 생일은 여름 햇살보다 더 찬란히 빛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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