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적과의 동침]
어느 한 여름날 밀린 과제를 하느라 기숙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페이스북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같은 대학에서 교환학생을 온 계기로 평소 친하게 지내던 H였다. 자기도 기숙사에서 과제를 하고 있다며, 같이 커피를 마시자는 내용이었다. H와 나는 따스한 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나의 기숙사 부엌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는 모든 한국에서 온 모든 교환학생들이 교환학생 연장 신청을 할 수 있는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우리는 교환학생이 끝나면 어떻게 할지, 한국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한 학기 더 머무를지에 대해 함께 고민했다. 나는 남자 친구인 A와의 관계 때문에 잠시 고민을 했지만, 이미 삼 개월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결정을 내린 후였다. 그녀 또한 독일을 떠날 것은 분명했지만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갈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는 문득 생각이 난 듯 터키에서 온 Y와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 중에 있다며 시간이 되면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그녀들이 이미 세워놓은 여행 계획을 들어보니 피렌체 공항으로 날아가 관광을 하고 배를 타고 근교의 무라노섬을 들른 후 플로렌스를 들려 피사에서 다시 독일로 오는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혼자가 아닌 여행은 독일에 와서 처음이었기에 구미가 당겼다. 나는 잠시 통장잔고를 생각해본 후 큰 고민 없이 그녀에게 승낙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그날 바로 그녀와 함께 비행기 티켓을 구입하고, 첫날 지낼 숙소를 예약했다. 여행을 떠나는 날 남자친구 A는 기꺼이 우리를 공항까지 차로 데려다주었고, 우리는 그 덕에 아주 수월히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독일에 30kg짜리 이민가방을 들고 온 것을 비롯해 모든 여행을 혼자 힘으로 해야 했기에 A의 도움이 더욱더 크게 보였다. 함께 여행을 가는 H와 Y도 덕분에 쉽게 여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며 A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공항에서 A와 작별인사를 했고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의 여행은 대체로 순탄하게 흘러갔다. 여행 중 종종 돌발상황이 있었지만 우리 셋은 서로에게 짜증이나 불만을 대놓고 표현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그럴 일도 별로 없었다. 피렌체 공항에는 해가 지기 시작하기 조금 전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나서야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숙소는 아담했지만 깔끔했고, 깨끗한 하얀색 침대보가 우리 셋의 침대에 깔려있었다. 우리는 숙소 앞 정원에 앉아 사진도 찍고 침대에 누워 함께 팩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우리는 짐을 들고 피렌체 시내로 버스를 타고 가서 숙소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대략 두 시간 후 세 번째로 들른 숙소에서 앞으로 삼일을 보낼 방을 예약할 수 있었다. 숙소 관리인은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였는데, 그의 인상에는 인자함보다는 깐깐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Y가 도맡아 숙소 값을 흥정하는 동안 나는 H와 함께 잠시 우리가 머물 숙소를 둘러보았다. 낡은 외관에 못지않게 허름해 보이는 내부는 방의 상태 또한 짐작케 해주었지만, 머리 위에 지붕이 있는 곳에서 밤을 보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든든했다.
숙소에는 대략 10여 개의 방이 있었고 방들은 4인에서 6인실로 다양했지만 모두 하나같이 노후된 상태였다. 배정받은 방은 4인실이었는데 한 60대 할머니와 방을 공유해야 했다. 그녀는 우리가 방으로 들어섰을 때 창문에서 제일 먼 문 앞 방 가장 안쪽 침대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와 간단히 인사와 통성명을 했다. 그녀의 첫인상은 썩 좋아 보여서 우리는 방값을 흥정한 기쁨에 더해, 앞으로 함께 지낼 룸메이트도 괜찮아 보인다며 좋아했다. 그날 밤 그녀와 겪게 될 갈등을 예상하지 못한채 말이다.
간단히 짐을 풀고 독일보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얇은 옷으로 갈아입고 난 후 시내로 갔다. 큰 맘먹고 찾아간 레스토랑에서 바가지를 써도 실수로 발을 밟혀 샌들이 끊어져 새로 사야 해도 마냥 즐거웠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7월 초의 피렌체는 마치 취한 것처럼 들썩이고 있었고 그 분위기는 해가지면서 더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우리 숙소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일정을 끝내고 숙소로 들어가니 방안의 불은 모두 꺼져있었고 우리의 유일한 룸메이트 할머니는 이미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때 내 시야에 활짝 열린 창문이 들어왔다. 열린 큰 창문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모기가 들어왔고 모기들은 상대적으로 창문 가까이에 있는 혈기왕성한 우리들을 물어대기 시작했다. 피곤함에 그저 잠에 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감싸 덮었봤지만, 사방에서 달려드는 모기들때문에 견디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들어 H와 Y를 보니 그녀들도 이미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었다. 이미 모기에게 수없이 물린 몸을 벅벅 긁으며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닫으려는 순간,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룸메이트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혔다.
"헤이! 나는 창문을 닫으면 답답해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어서 창문을 다시 열어"
"하지만 모기가 계속 들어오잖아요. 우리야 말로 모기 때문에 지금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건 내 문제가 아니야, 아무튼 나는 창문을 닫고는 잠을 잘 수 없으니 당장 창문을 열라고"
그녀는 창문을 닫으려던 나뿐만 아니라 이 상황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H와 Y에게도 막무가내로 짜증을 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이 넘은 늦은 시간이었다. 더 이상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던 나는 일단 창문을 열어두기로 하고 자리로 돌아가 다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다음날이 밝았다. 눈을 떠보니 룸메이트 할머니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후였고, 첫날의 미소는 이미 그녀의 얼굴에서 사라진 후였다. 우리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이내 무시하기로 하고 마찬가지로 외출 준비를 마치고 다시 시내로 나갔다. 숙소 밖에서의 시간은 너무나 즐거웠다. 베네치아는 모든 곳이 그림같이 아름다웠고, 사방이 유명한 관광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는 리알토 다리에서 사진을 찍고, 마르쿠스 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바다가 보이는 돌담 위에 앉아 여자 셋이 나란히 생에 첫 시가를 엉터리로 피워보기도 하면서 여행을 즐겼다. 이제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익숙해질 정도로 그렇게 베네치아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다시 밤이 깊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정이 조금 안된 시간에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 안에는 룸메이트 할머니가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고, 창문은 역시나 활짝 열려있었다. 이미 예상했던 터라 우리는 샤워 후 미리 사놓은 모기약을 꺼내 우리의 침대 주변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고 있는 줄 알았던 그녀가 다시 벌떡 일어나서는 우리에게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지금 너네 뭐 하는 거야!"
"당신은 창문을 닫으면 잠을 못 자고, 우리는 창문을 열어놓으면 모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요. 그러니 모기약을 뿌릴 수밖에 없어요"
"지금 너네 나를 죽이려는 거야?"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모기약을 뿌리는 거뿐이잖아요. 당신 쪽에는 뿌리지도 않는다구요."
"지금 방안에 냄새가 가득 차잖아! 나는 이 냄새가 불쾌해!"
"공동숙소에서 지내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만 할 수는 없어요. 우리도 창문을 여는 것을 이해해주잖아요."
그러자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모국어로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함은 우리 방뿐만이 아니라 낡고 얇은 벽을 넘어 다른 방에도 들린듯했고, 이내 다른 방의 사람들도 우리 방안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숙소관리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우리의 갈등을 중재해줄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소란을 피우기 싫어요. 지금 다른 사람들도 우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게 되잖아요. 그러니 창문을 닫든지 모기약을 뿌리는 거에 상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도대체 어디에 모기가 있다는 거야. 나는 단 한 번도 물리지 않았다고"
"그건 당신이 창문에서 가장 먼 곳에 있기 때문일 거예요. 여기를 봐요. 우리 셋은 모두 지난밤부터 모기에 시달리고 있다고요"
나는 그녀에게 팔을 뻗어 모기에 물린 곳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완강했다.
"밖에서 돌아다니다 물렸는지 어떻게 알아? 그건 내가 알바 아니야. 나도 조용히 잠을 자고 싶으니 어서 모기약 뿌리는 걸 그만두고 그냥 잠을 자라고. 나는 내일 체크아웃할 예정이니 그 후엔 너네가 하고 싶은 대로 창문을 닫던지 모기약을 방안 가득 뿌리던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녀는 콧웃음을 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나도 말없이 창문을 반쯤 닫고는 침대로 돌아갔다. 우리 방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 몇 명도 이내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전날 밤 말한 대로 체크아웃을 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고, 이내 우리에게 단 한마디 인사도 없이 방문을 쾅하고 세게 닫고는 그 길로 숙소를 나서는 듯했다. 우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안도감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떠난 후 우리는 베네치아에서의 남은 일정을 즐겼고, 밤에는 창문을 닫고 모기와의 씨름 없이 고요히 잠을 잘 수 있었다. 마지막날은 배를 타고 무라노 섬에 들려서 상대적으로 베네치아 보다 조용한 그곳의 풍경을 관광하고 저녁에는 조그만 레스토랑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시며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베네치아의 마지막 날을 보냈다. 다음날 우리는 다음 도시인 피렌체로 향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애증이 섞인 숙소를 떠났다. 베네치아의 숙소에서 얻은 교훈을 통해 우리는 전날 밤 이미 피렌체 숙소를 예약해 놓았다. 공동 숙소가 아닌 우리만 쓰는 삼인실 숙소여서 조금 더 값을 치러야 했지만, 우리는 무언의 합의를 통해 그것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피렌체에는 베네치아만큼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지만, 도시는 어쩐지 비교적 고요하게 느껴졌다. 해질무렵 찾은 미켈란젤로 언덕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언덕 위에는 가족, 연인 단위의 관광객들과 현지인으로 보이는 젊은이들 그리고 관광객들의 눈을 사로잡을 각종 기념품들을 파는 상인들과 인디언 콘셉트의 음악가들이 모여있었다. 도착한지 삼십 분 정도가 흐르자 마침내 노을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과 피렌체 도시와 아르노(Arno) 강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장관이었고 나는 그것을 보며 이 순간은 오늘 지는 석양과 그 아래를 흐르는 강물처럼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생각했다.
다음날, 나는 아침 일찍 여행 동반자들과 며칠 후 독일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라는 작별인사를 나누고는 홀로 피렌체 공항으로 향했다. 혼자 하는 비행은 H와 Y 이탈리아로 올 때보다 확연히 외로웠다. 짧은 여행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처음 여행을 시작했을 때는 셋 사이 어느정도 감돌았던 어색함도 여행이 끝날 때쯤에는 거짓말같이 사라져 있었다. 술을 입에 대지 않는 Y는 저녁에 주로 일찍 잠에 들었지만, 나와 H는 숙소 밖 계단에 걸터앉아 와인을 병째로 나누어 마시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었다.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그때만의 고민들, 지금은 이미 다 해결되었을 것이 분명한 그 순간만의 비밀들은 아직도 이탈리아 어딘가에서 공기에 떠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비행기는 덜컹거리며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 공항에 착륙했다. 기장의 착륙 안내 인사가 스피커를 통해 나오자 비행기의 모든 사람들은 즐겁게 박수를 치며 착륙을 축하했다. 비행기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A에게 메시지를 했다. 짐을 챙겨 게이트를 나오니 꽃 한 송이를 들고 서있는 A가 보였다.
"잘 다녀왔어? 보고 싶었어."
"나도 니가 너무 그리웠어. 참, 너에게 할 얘기가 너무 많아. 오늘 밤은 내 여행 이야기로 둘이 한잔 해야겠어."
"좋아. 짐 이리 줘 내가 들게."
그렇게 나는 짧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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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독일, 이방인으로 다시 서기
한국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다 어느 날 마음이 펑하고 터져버린 저자는 문득 새로운 경험을 찾아 독일로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 어렵게 찾은 보금자리에 들어선 순간 남자들이 우글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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