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견문록

14 - 그의 방에 남겨놓은 소녀

비바제인 2023. 3. 28. 02:03

[독일에 남은 둘만의 비밀]

 

어느덧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게되었다. 독일에서의 학기는 이미 끝났고 기숙사 방들도 하나씩 비워지기 시작했다. 반년 동안 가족을 무척 그리워하던 친구들은 학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돌아갔고, 몇몇은 독일을 떠나 유럽여행을 하기도 했다. 잔치는 끝났고 손님들은 이제 자리를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 또한 교환학생 연장을 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후라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다. A와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기에 더욱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마침내 인연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시한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몰랐다. 



이제는 집같이 느껴지는 내 방 기숙사에 누워서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생각해보았다. 모든 익숙한 것들로의 회귀는 내 지난 23년간의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했다. 많지는 않지만 한국에는 내가 이뤄놓은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약속해 주는 것은 어쩌면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뿐이었고, 나의 영혼을 충만하게 해주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시간들을 슬픔이 잠식하지 못하게 우리는 평소에는 이별이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행동했다. A와 나는 함께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산책을 하고 이야기를 했다. 특별한 것을 하지는 않았어도 그저 매일이 특별하게만 느껴지는 일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다르게 하루하루 우리에게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우리가 모른 척하려고 할수록 그 존재는 더 선명해지기만 했다. 이별이 입에 오를 때마다 저릿해지는 마음은 나의 눈물샘을 늘 자극했고, 눈물은 종종 A앞에서도 눈치 없게 흐르곤 했다. 그럴 때면 A는 의연하게 우리의 미래는 아직 알 수 없으니 아직 슬퍼하긴 이르다고 나를 달래주었다. 머리로는 그의 말을 이해했지만 마음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저녁을 해먹기 위해 A와 나는 장을 보러 시내로 나가고 있었다. A는 그전에 언젠가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자신의 방 한쪽 벽면에 벽화를 그려주기를 부탁했었다. 그가 원했던 벽화는 내가 언젠가 그에게 준 엽서에 그려진, 소녀의 치마폭에서 날아가는 나비들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문득 그의 부탁이 떠오른 나는 그에게 물감을 사러 가자고 이야기했다. 그는 내가 자신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는 것에 감동한 듯했고, 우리는 바로 시내의 문구점으로 발길을 향했다. 이어서 우리는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면서 예거마이스터를 한 병을 샀다. 저녁을 먹은 후 벽 앞에 놓인 A의 침대를 한편으로 미뤄놓고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미대 입시 준비를 하면서 수없이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벽화처럼 큰 스케일의 그림은 그려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림을 망쳐서 그의 방에 못생긴 그림만을 남겨놓고 한국으로 떠 떠나게 되면 어떡하나 싶기도 했다. 밑그림을 위해 잘 깎아놓은 연필을 들고서 나는 한참을 벽 앞에 서서 망설였다. 그런 나를 보며 A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왜 그래?"

"걱정이 되어서, 잘 못 그리면 어떡하나 싶은 마음이 드네"

"걱정하지 마. 잘 못 그리면 못 그린 대로 나는 너의 그림을 좋아할 거야. 나는 너의 그림솜씨를 믿어"

"정말? 이건 검은 물감이라 실수했다가는 지우기도 힘들 거야"

"그림이 완벽하지 않아도, 나는 매일 아침 너의 그림을 보면서 눈을 뜰 거고 네 생각을 할 거야. 나한테 그거면 충분해"

그림을 그리는 동안 A는 곁에서 기타를 연주하기도 하고 종종 밑그림에 맞춰 까맣게 물들어가는 벽을 보며 감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피곤했던 나머지 마지막 나비 두 마리의 채색을 남겨두고 A방에서 그대로 잠에 들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아오자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이 나를 깨웠다. A는 내가 잠에서 깬 것을 보고는 부드럽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순간 어제 그렸던 벽화가 생각이 나자 나는 몸을 반쯤 일으켜 벽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전등불 밑에서 완성되었던 그림은 이제 따사로운 여름 햇살을 받으며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 어제 완성하지 못했던 나비 두 마리가 칠해져 있는 것이었다. 내가 어리둥절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니 A가 수줍은 듯 말했다. 내가 잠든 후 그는 나를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앞으로 자신의 곁을 떠나게 될 이 여자애가 마치 벽에 그려진 나비같이 느껴졌다고. 그리고는 살면서 그림을 그려본 것이 손에 꼽지만 자신도 취기를 빌려서 용기를 내보았다고. 그제야 그림이 완성이 된 이유를 깨달은 나는 그가 그렸다는 나비 두 마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삐뚤빼뚤 하게 채워진 색과 테두리는 약간은 어설퍼 보였으나, 우리의 그림은 비로소 완성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그와 내가 함께 완성한 우리만의 벽화가 그의 공간에 남게 되었다. 그와 함께 한 2013년의 봄과 여름 그리고 환하게 빛났던 우리들의 추억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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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독일, 이방인으로 다시 서기

한국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다 어느 날 마음이 펑하고 터져버린 저자는 문득 새로운 경험을 찾아 독일로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 어렵게 찾은 보금자리에 들어선 순간 남자들이 우글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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