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그리고 남자 친구와의 마지막 3일]
72시간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3일뿐이었다. 독일 그리고 남자 친구와의 이별은 피하고 싶은 현실이었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성실하게 흘러갔다. 이미 룸메이트 친구는 한국으로 돌아가버린 후였기에 나의 기숙사 방에는 모든 것이 반만 남아 있었다. 나는 남은 삼일 동안 한국으로 가져갈 짐들을 챙기는 동안 독일에서의 남은 생활도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기숙사도 이미 같은 학기에 입주한 학생들이 반이상 고국으로 돌아간 후였고, 매일같이 들리던 음악소리도, 매주 열리던 파티도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마치 늘 그랬던 것 같이.
한국으로 가져갈 짐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올 때는 분명 30kg가 가득 차게 이민가방을 채워왔지만, 돌아갈 때 가져갈 짐들을 넣고 나니 오히려 가방은 조금 더 가벼워져 있었다. 학교에 제출하고 남은 과제물들, 남자 친구가 선물로 준 팔찌 그리고 한국의 가족들을 위해 산 기념품과 몇 가지 독일어 책들이 늘어난 짐의 전부였다. 하지만 가득 차게 된 것도 있었다. 노트북과 메모리카드에 가득 담긴 독일과 유럽에서의 사진들, 추억들 그리고 A의 존재.
그렇게 짐을 정리하고 나니 방에는 두 가지가 남아있었다. 하나는 독일인 버디 친구가 빌려준 하얀색 면 커튼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내로 나가는 버스들의 노선표였다. 커튼은 깨끗이 세탁해 쇼핑백에 넣어 돌려주었다. 그리고 버디와도 작별인사를 했다. 남자 친구를 만나기 전 독일 생활 초기에 나의 버디는 디자인과에서 온 우리 세명의 여자애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었다. 쇼핑백에 담긴 커튼을 돌려주면서 그녀와도 짧고 진한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 방에 새로 들어올 사람들을 위해 버스 시간표는 굳이 버리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기로 했다. 독일의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던 6개월 전의 나처럼 이곳에 새로이 올 이름 모를 누군가를 위해서.
시간이 나면 종종 도보로 이십 분을 내려가 들렸던 친절한 터키 아저씨가 운영하던 베이커리에도 마지막으로 방문해 빵과 군것질 거리들을 샀다. 아저씨는 종종 나에게 서비스라며 커피를 공짜로 주고는 했다. 서투른 독일어로 주문을 하는 내게, 아저씨는 매번 내 독일어가 빨리 늘고 있다며 칭찬을 해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저씨에게 내가 며칠 후 독일을 떠날 것이라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올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이커리 문을 나서는 나의 손에는 두 개의 커피가 들려있었다. 나는 A에게 그의 취향에 맞게 탄 우유와 설탕을 넣은 블랙커피를 건넸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슬픈 기색이 역력한 나를 보며 A는 말했다.
"다시 독일에 오게 되면 이곳부터 들리겠네?"
"아마도. 근데 아저씨는 아마 나를 그새 잊어버릴 수도 있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다시 와서 아저씨를 보고 웃으면 다시 기억해 주실 거야. 너의 미소는 쉽게 잊기 힘드니까."
"네가 따듯한 말을 할 때마다 괜히 더 슬퍼져."
"왜?"
"이곳에서의 좋은 추억들이 쌓여갈수록 이별이 더 힘들어 지니까."
"독일을 떠나는 것이 나와의 이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야. 게다가 우리는 앞으로의 일을 알 수 없어. 그건 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니까. 인간들은 그저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해."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마음은 그게 잘 안 되네. 나에게 이제 독일은 마치 제2의 고향이 된 것 같은 기분이야. 한국 외에 다른 나라에서 이렇게 오래 지낸 것은 처음이니까.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그렇다면 더욱 좋은 일이네. 고향은 네가 언제 다시 오던 늘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48시간
작별의 날이 오기 두 달 전부터 남자 친구와의 이별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흘렀다. 기숙사 방에서 홀로 있을 때나, 그의 품에 안겨있을 때나 이별의 날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나. 하지만 오히려 작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이 현실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려 했다. 울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우리에게 약속된 시간은 너무나 짧았기 때문이다. 대신 더욱 자주 그의 얼굴을 눈에 그리고 마음에 담아두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에게 기억될 나의 얼굴이 늘 행복한 표정이기를 바랐기에 나는 A를 볼 때마다 더욱더 많이 웃으려 애썼다.
둘 다 학생의 처지던 우리는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해 근사한 레스토랑에 갈 수는 없었다. 대신 그의 방을 깨끗하게 청소한 후 마트에서 한가득 음식과 술을 사서 우리만의 조촐하지만 풍성한 식탁을 차렸다. 함께 요리를 하고 싸구려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하고는 방 안에서 빔프로젝터로 영화를 보았다. 그는 내가 슬퍼할 때마다 디즈니 영화를 틀어주고는 큰 아이스크림 한통을 안겨주곤 했다. 그날은 나름 스스로는 계속 웃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여김 없이 남자 친구는 아이스크림을 가득 떠다 주었다. 내가 슬퍼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잠시 방을 나간 사이에 나는 몰래 준비해 두었던 것들을 꺼내 놓았다. 그에게 줄 편지 한 통과 작은 빨간색 탁상시계였다. 탁상시계는 독일시간이 아니라 한국시간에 맞춰있었다. 그는 방으로 돌아와 시계를 보고는 물었다.
"웬 시계야? 시간을 보니 고장 난 거 같은데?"
"그렇게 보이지? 근데 고장 난 건 아니야, 한국시간에 맞춰 놓았어. 한국과 독일의 시차는 8시간이야. 네가 자는 시간에 나는 깨어있을 거고, 나에게 밤이 오면 너는 햇살을 맞으며 일어나겠지. 하지만 시간이 늘 멈추지 않고 흐르듯 나는 너를 변함없이 생각할 거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필요 없다는 듯이.
24시간
독일에서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지난밤 A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느라 늦은 밤 잠자리에 들었건만, 어쩐지 깊은 잠을 자지는 못했다. 아직 여명이 찾아오기도 전인 이른 새벽 옆자리에서 고요히 자고 있는 A의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솟아오른 눈썹 뼈 아래로 이어진 깊은 눈매와 곧은 콧대 그리고 그 아래로 자리 잡은 정갈한 입술. 두 뺨에는 따듯한 갈색빛의 수염이 빼곡하게 나 있었다. 슬며시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져 보았다. 감긴 눈 아래의 초록색 눈동자는 무슨 꿈을 꾸는 걸까. 생김새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나와 그는 어떤 인연으로 함께하게 된 걸까. 우리의 인연은 끝이 정해져 있는 걸까?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뒤로하고 조용히 그의 방을 나왔다. 동쪽에 위치한 부엌의 창문에는 서서히 아침해가 뜨고 있었다. 플랫 안의 그 누구도 깨우고 싶지 않았던 나는 조용히 부엌문을 닫고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커피가 완성될 무렵 복도 쪽에서 인기척이 나는 듯하더니 얼마 안 있어 부엌문이 살짝 열렸다. A였다. 그는 중저음으로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를 건네고는 역시 커피를 잔에 담아 창문 밖을 내다보며 등 돌아 서있는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마지막 날에 걸맞은 조용한 아침이었다.
점심에는 오래전 그와 약속했던 일을 드디어 마무리했다. 그것은 그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이었다. 깨끗하게 비워진 나의 방에 등받이와 팔걸이가 없는 키가 큰 검은색 스툴 하나와 하얀색 등받이 의자를 놓고서는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그에게 스툴에 앉아서 하얀색 의자에 다리를 걸칠 것을 요구했다. 그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평상복 차림이었지만 회색 후드티에 어두운 베이지색 면바지가 그의 차분한 인상을 돋보이게 했다. 우리는 십 분도 안되어 빠르게 촬영을 마쳤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뷰파인더 사이로 그의 얼굴을 보는 게 슬퍼졌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A가 나에게 요리를 해 주었다. 나는 식탁의자에 앉아 요리하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참 그리울 얼굴이다라고 생각했다.
3시간
비행시간을 3시간 남겨두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날씨는 맑았고 여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항공수화물을 맡기는 카운터에 가서 짐가방을 맡기고 체크인을 마치니 우리에게는 두 시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A는 시간이 남았으니 잠시 공항 지하의 마트로 가자고 했다. 그가 그저 배가 고픈가 싶었던 나는 별말 없이 그를 따랐는데, 그는 마트에서 갑자기 초콜릿과 하리보 젤리 등을 고르기 시작했다. 계산을 마친 그는 나의 가방에 군것질 거리를 넣어주며 말했다.
"비행기에서 배가 고프면 이거 먹어. 너 배고픈 거 잘 못 참으니까."
한 시간을 남겨두고는 천천히 게이트로 걸어갔다. 오른편에는 탑승 수속을 받는 게이트가 있었고 정면에는 유리벽으로 둘러 쌓인 구석진 자리가 있었다. 우리는 그곳으로 가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작별의 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는 내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잠시라도 이 잡은 손을 놓치면 연기처럼 모든 게 사라질 것 같았다.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자 이제는 눈물을 막아줄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더 이상 A 방안에 있지도, 나의 울음을 막아줄 어린이용 영화도, 아이스크림도 없었다. 나의 눈은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그는 나의 눈물을 보며 가슴 아파했지만, 이내 우는 나의 모습이 귀엽다며 장난을 칠 뿐이었다. 나는 그의 노력에 웃음 지으려 노력했지만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노력은 모래성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그는 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가 영영 못 만나게 되는 게 아니야. 나는 너를 만나러 갈 거고, 너도 나를 만나러 올 거잖아. 예전처럼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은 슬프지만 다시 만나면 우리는 그만큼 더 기뻐할 거야. “
„하지만 나는 당장 네가 없는 내일이 너무 슬퍼. “
„나도 그래. 하지만 잊지 마. 우리가 늘 서로를 생각한다면 그것이 함께 있는 거랑 다를 바 없어. 우리는 매일 연락할 거잖아. 아침에는 나는 너의 메시지로 눈을 뜨면서부터 너를 생각할 거고, 너는 나의 메시지로 저녁을 마무리할 수 있어 “
„약속해줘. 나를 잊지 않겠다고. “
„내가 너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약속할게 “
게이트 마감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머리 위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시계를 뒤로 돌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백번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게이트의 마지막 안내 방송에 맞춰 우리는 잡은 손을 놓아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내 다시 몸을 틀어 서로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의 마지막인 포옹과 키스를 나누었다. 사람들의 존재는 잊혀갔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끝이 났다. 나는 울음을 멈추지 못한 채로 여권을 들고 게이트 쪽으로 혼자 걸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그의 눈도 나처럼 젖어 있었다. 내가 처음 본 그의 눈물이었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내가 그와 사랑에 빠진 그날의 그 미소처럼.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자 나는 이내 몸을 돌려 탑승구로 걸어갔다.
잘 있어, 독일. 잘 있어, 나의 따뜻한 사람아.
Auf Wiedersehen! Deutschland und meine Lie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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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독일, 이방인으로 다시 서기
한국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다 어느 날 마음이 펑하고 터져버린 저자는 문득 새로운 경험을 찾아 독일로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 어렵게 찾은 보금자리에 들어선 순간 남자들이 우글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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