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끝... 그리고 그 이후]

2012년 겨울 나는 한 겨울의 종로 시내를 어두운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허름한 건물들을 온갖 상가들이 채우고 서 있었고, 왼쪽 편에는 광역버스와 시내버스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하얀 토끼처럼 시간에 쫓긴 채 8차선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선임은 동화에 나오는 애벌레처럼 친절하게 대해주면 이내 본인의 성격을 드러내었고, 그 보다 더 직급 높은 상사들은 미친 모자장수처럼 이상한 요구와 질문들로 나를 당황하게 하곤 했다. 큰 고층 회사 속 사회에는 하트 여왕도, 체셔 고양이도 또한 트럼프 병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바쁜 사람들의 도시에서 나는 늘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처럼 어리둥절해 있었다. 이해나 적응을 해보려 노력할수록 나는 점점 더 미궁에 빠졌다. 물약을 먹고 크고 작아지는 앨리스처럼 실수를 할 때는 나는 하염없이 작아졌고, 어쩌다 칭찬이라도 받은 날에는 내가 마치 거인처럼 커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어느 무렵 더 이상 이 기묘한 줄거리를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익숙하지만 불편한 이 꿈에서 깨어나 나만의 시계를 들고 세상으로 나가보리라.
한국에서 터져 버린 마음을 채워줄 도피처는 우연인 듯 운명인 듯 독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나는 이내 도착하자마자 깨달았다. 꿈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꿈을 연달아 꾸게 된 것이라는 것을. 낯선 땅에서 이방인이라는 존재로 시작한 독일에서의 삶은 처음에는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어느 날은 방안 침대에 누워 외로움에 흐느껴 울기도 하고, 어느 날은 생애 처음 당한 인종차별로 분노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내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이 꿈에서 저 꿈으로 도망만 다니다 그 안에서 길을 잃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평소 생각지 못한 일들을 벌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데 있어 더욱더 용기를 내려 애썼다. 혼자 떠나는 카우치서핑, 사진 수업, 누드 사진 촬영과 프랑스로의 캠핑, 친구들과 떠난 이탈리아 여행, 벽화 그리기 등은 스스로 틀을 깨고 나오게 된 계기들이 되어주었다.
이미 추억이 된 오래 전의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명확히 정해놓았던 것은, 이 이야기는 결말이 없다는 것이었다. 독일 교환학생 6개월 동안의 이야기는 내 인생의 한토막일뿐이다. 하지만 2013년 초봄부터 늦여름까지 독일에서 보낸 시간들과 그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그 이후의 내 삶의 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나는 한국에 돌아온 지 정확히 1년 3개월 만에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우연히 가게 된 곳이 독일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나는 독일에 대한 동경도 선입견도 없는 상태에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나에게로 하여금 색안경을 끼지 않고 독일에 대해 알아갈 수 있게 도움이 되어 주었다. 독일은 생각보다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었다. 그러한 다양성은 개인과 단체의 성향과 특성을 정의 내리는 데 있어 어려움을 준다. 더군다나 6개월이라는 시간은 한 나라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충분하지는 않은 시간이다. 또한 내가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은 그것이 나였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같은 시간에 내가 머물렀던 장소들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면 나와는 현저히 다른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몇몇의 구독자분들이 나의 글에 공감을 표해준 덕분에 오래 묵혀두기만 했던 이야기를 끝까지 쓸 수 있었다. 그중에는 독일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사람들이나 외국에서의 경험 또는 국제연애에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중 몇은 나의 글을 좋아해서 찾아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감히 해본다. 이유야 어쨌든 나의 짧은 글이 조금이나마 즐거움을 주었기를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매번 나의 글을 처음으로 읽으며 실수를 찾아내 준, 그리고 마지막 글의 일러스트를 기꺼이 그려준 독일에서 함께 고군분투하고 있는 내 일기장 같은 친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독일, 이방인으로 다시 서기
[Ende]

교환학생 이후의 이야기는 브런치북 [나의 독일 ABC]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eindeutschabc
[브런치북] 나의 독일 ABC
'나의 독일 ABC'는 저자가 4년 3개월 동안 독일에서 유학을 하며 새로운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게 되는 이야기 입니다. 복잡한 생각들을 뒤로한 채 독일로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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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비바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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