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교환학생 7

11 - 생일이 뭐 별건가

[독일에서 맞은 스물세번째 생일]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기 전 6월 초의 어느 오후 나는 기숙사 방안 창가에 앉아 골몰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창 밖에는 여름이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의 도착을 알리고 있었다. 길어진 여름 해와 함께 두 기숙사 건물 사이에 서있는 이름 모를 나무들은 여름 바람의 장단에 맞춰 살랑살랑 몸을 흔들었다. 가지마다 이파리가 빼곡히 달려있었다. 그 위로는 청설모들이 짝을 맞춰 오르락내리락 곡예를 부렸다. 나무 그늘 아래엔 기숙사 학생들이 삼삼오오 계단에 앉아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함께 노래를 들으며 드디어 찾아온 독일의 여름날을 만끽했다. 그렇지만 나는 온순해진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이 주는 행복을 만끽할 수 없었다. 6월이 왔다는 것은 곧 내 생일이 다가온다는 것을 뜻했다. 머리 뒤에 ..

독일 견문록 2023.03.22

8 - 동화의 결말이 늘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니까

[엇갈린 듯 맞추어진 우리의 인연] 어릴 때 봤던 동화는 모두 이렇게 끝이 났다. '공주는 왕자님과 입맞춤을 했고 둘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제 어른이 돼버린 나는 알고 있다. 대부분의 동화는 사실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고, 해피엔딩의 정의 또한 다시 따져보게 되는 것이 어른이라는 것을. 현란한 음악과 조명 그리고 그 아래에서 일어났던 해프닝 같은 입맞춤은 동화 속 마법 같은 일이었지만 입맞춤이 끝났을 때는 우리가 현실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A와 나는 플랫으로 함께 돌아가기를 약속하고 잠시 서로의 친구들에게로 돌아갔었는데, 몇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난 그는 그새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나와 룸메이트 그리고 그녀가 클럽에서 사귄 다른 친구 한 명과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

독일 견문록 2023.03.19

7 - 개강파티에서 생긴 일

[모든 이야기의 시작] 독일 가면 독일 남자랑 데이트 꼭 해봐야 해! 친구들은 내게 힘주어 말했다. 독일을 떠나기 얼마전 나는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짧은 연애를 뒤로하고 있었다. 8년이 지난 지금은 이름 조차 희미해져 가는 딱 그 정도 사이의 남자였다. 추억이라 하기엔 내용이 없고 모른 척 지나가기엔 마음속 돌멩이 하나가 꿈틀 하는 기분이 드는 정도의 인연. 나의 교환학생 기간의 반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그의 프로필 사진은 이미 새 연인과 함께였고 한국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웨딩 사진으로 바뀌어있었다. 이별을 뒤로한 채였지만 그렇다고 독일에서 어떤 특별한 인연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반년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고, 어쭙잖게 마음을 주었다 장거리 연애 따위로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싶지도 않았..

독일 견문록 2021.05.11

6 - 묘지 옆의 학교

[봄과 함께 찾아온 새학기의 시작] 삶에 대해서 사색하기에는 묘지만큼 좋은 장소는 없을 것이다. 처음 하이델베르크를 여행했을 때 주변의 산책할만한 곳을 묻는 나에게 민박집 사장님은 공동묘지를 알려주었다. 순간 한국의 공동묘지가 떠올라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사장님의 표정을 보니 농담은 아닌 듯했다. 그녀는 독일 공동묘지가 '사색을 하기 좋은 곳'이라며 덧붙였다. 다음날 간단히 아침을 먹고 공원으로 향하던 중 문득 호기심이 들어 새벽안개가 채 가시기 묘지로 발길을 향했다. 어젯밤 들었던 설명을 기억해내며 오분쯤 걸어가니 낮은 철문으로 닫혀있는 공동묘지가 눈에 들어왔고 묘지의 낮은 돌담 너머로 조문객들이 몇명 보였다. 녹이 슬어있는 초록색 철문을 손으로 살며시 밀자 문은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묘지 안쪽으로 열렸..

독일 견문록 2021.03.10

5 - 소파 좀 빌려줄래? (2)

[다시 소파를 빌리러 베를린으로] 기차로 다섯여 시간을 달려 도착한 베를린 중앙역은 수도인 만큼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안에는 양복을 입고 서류가방을 든 직장인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쇼핑을 하는 젊은 엄마들, 배낭을 들고 여행을 떠나는 가족들로 가득했다. 플랫폼에 서있는 기차들은 이름만 들어도 이미지가 떠오르는 유명한 유럽의 여러 도시들로 승객을 실어 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호스트와 만나기로 한 날짜보다 하루 먼저 도착했기에 미리 예약해놓은 근처의 게스트 하우스로 발길을 옮겼다. 도착해보니 내가 묵게 된 곳은 규모는 여느 소규모 게스트하우스와는 달리 호텔만큼 큰 건물이었다. 결제한 금액을 생각해보니, 순간 이곳이 맞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카운터에서 예약정보를 확인하고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

독일 견문록 2021.02.11

4 - 소파 좀 빌려줄래?

[겁도 없이 시작한 카우치서핑과 유럽여행] 독일어 어학수업은 부활절을 며칠 앞두고 종강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부활절은 우연히 그날 마침 교회 앞을 지나가게 되면 장식된 삶은 달걀을 받게 되는 날이었지만, 이곳에서 부활절은 독일인들이 몇 주전부터 집 밖과 안에 부활절 장식을 하고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다. 그리고 단순 하루 동안의 교회 행사가 아니라 독일 전역에 걸쳐 며칠간의 부활절 휴일도 이어진다. 나 또한 다른 의미에서 독일어 수업의 종강과 부활절 휴일을 기다려왔다. 바로 독일에서 처음 다른 도시로 떠나는 여행을 계획해 놓았기 때문이다. 행선지는 하이델베르크였고 동행인은 없었다. 무뚝뚝해만 보이던 독일어 선생님은 우리에게 종강 겸 오스턴(부활절) 선물이라며 토끼 모양의 초콜릿을 나누어주었다. 수..

독일 견문록 2021.02.03

3 - 헬로, 아이 라이크 애이시안걸

[독일에서 한국인 여자로 산다는 것] 찬 공기와 시도 때도 없이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점차 따듯한 햇살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 즈음 독일어 어학수업이 시작되었다. 기숙사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학생들 중 교환학생들을 알아보는 것은 쉬웠다. 두리번거리며 차창밖을 살펴본다던지 정류장 앞에 서서 상기된 얼굴로 버스노선을 확인하는 학생들은 열이면 열 교환학생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내가 있었다. 일단 서로의 신분을 알게 되면 같은 처지라는 소속감이 생긴다. 인사와 동시에 이름을 밝히는데 그 후 묻는 것들은 어디서 왔느냐,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정도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말하면 늘 같은 것을 물었다. "그럼 너 북한에서 왔어?" 그리고 어김없이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동양인이 유독 적은 독일의..

독일 견문록 2020.11.10